고(高)금리·고물가로 식어가던 내수가 경기 부진과 정치 불안이 겹친 작년 들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대표적인 내수 지표인 소매 판매가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어 21년 만에 최악의 소비 절벽이 나타났다. 또 다른 내수 지표인 건설 공사 실적도 3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악화된 것으로 집계되는 등 내수 부진의 골이 깊어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3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12월 및 연간 산업활동 동향’에 따르면, 작년 연간 소매판매액은 전년보다 2.2% 감소했다. 신용카드 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372만명까지 불어났던 2003년(-3.2%) 이후 21년 만에 가장 큰 낙폭이다.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 0.1% 감소했던 소매판매는 이듬해 5.8% 증가세로 돌아섰었다. 하지만 고금리·고물가로 2022년 다시 0.3% 감소했고 2023년엔 수출 부진까지 겹쳐 소매판매가 1.5% 감소했다.
◇소매판매 3년째 ‘마이너스’
작년에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낮추기 시작하고 물가가 2%대로 안정된 데다 수출도 증가세로 들어서면서 소비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정부는 기대했지만, 경기 회복 지연과 소비 심리 위축으로 사람들이 지갑을 열지 않았다. 통계청이 산업활동 동향 조사를 시작한 1995년 이후 소매판매가 3년 연속 감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품목별로 보면, 고가 소비재 품목인 승용차(-7%)와 가전제품(-3.3%)의 소비 부진이 두드러졌다. 화장품(-3.9%)과 의복(-3.3%), 가방(-2.9%)도 판매가 시들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안 그래도 고금리·고물가로 사람들의 소비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사는 소비가 만연해진 결과”라고 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가계 부채의 부담이 여전한 점도 내수 부진의 원인”이라고 했다.
◇연말 특수 실종에 숙박음식업 직격탄
12·3 비상계엄과 이어진 탄핵 정국으로 송년회 등 ‘연말 특수’가 실종된 점도 소비에 찬물을 끼얹었다. 작년 12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6% 감소해, 9월(-0.3%·10월(-0.7%)·11월(보합)에 이어 4개월 연속으로 감소하는 흐름을 보였다. 골목 상권 내수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숙박·음식업 분야 서비스업 생산은 작년 12월 3.1% 감소해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했던 2022년 2월(-6%) 이후 2년 10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와 일주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에 따른 추모 분위기가 확산하며 골프장·스키장·테마파크 등의 영업 실적을 집계한 예술·스포츠·여가 분야 생산 지수도 6.9% 감소했다.
내수의 또 다른 축인 건설도 부진한 흐름을 이어갔다.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토목·건축 분야 건설 실적을 뜻하는 ‘건설기성’도 작년 한 해 4.9%나 줄어 2021년(-6.7%) 이후 3년 만에 가장 큰 낙폭을 보였다. 다만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 실적이 회복되면서 작년 산업 생산은 1.7% 늘어 전년(1%)에 비해 증가 폭이 커졌다. 반도체 제조용 기계를 늘리는 공장이 늘면서 작년 설비 투자도 4.1% 증가했다.
◇경차·상용차 판매도 급감
지난달 ‘불황형 자동차’로 꼽히는 경차와 상용차마저 판매가 줄어드는 등 내수 부진은 새해 들어서도 이어지는 분위기다. 국내 완성차 5사(현대차·기아·GM 한국 사업장·KG모빌리티·르노코리아)는 지난달 국내에서 9만 587대를 판매했다고 3일 밝혔다. 작년 1월 대비 11.8% 줄어든 수치다. 특히 캐스퍼(-69.2%), 레이(-6.2%) 등 경차와 포터(-32.3%), 봉고(-21.3%) 등 상용차 판매 감소가 두드러졌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 관계자는 “청년층과 자영업자 등 자금 부담이 큰 이들에게서 자동차 수요가 더 크게 위축되고 있다” 고 했다. 전문가들은 내수 부진 장기화로 타격이 큰 저소득층과 소상공인 위주로 재정 지원을 늘려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교수는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통해 돈을 받으면 즉시 소비 증가가 나타나는 저소득층과 소상공인 위주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