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김모(43)씨는 신용카드 6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김씨가 실제 쓰는 카드는 2장이다. 나머지 4장은 마지막으로 쓴 지 일 년이 훌쩍 넘고, 어디 뒀는지도 모른다. 김씨는 “일단 연회비를 안 내도 되고, 일 년 이상 내가 쓰지 않은 카드라 누군가 가져가도 이용할 수 없다 보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0일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 카드사 8곳과 은행 11곳이 발행한 신용카드 중 휴면 카드는 1941만장에 이른다. 휴면 카드는 소비자가 사용한 지 1년 넘은 카드를 가리킨다. 휴면 카드는 2021년만 해도 1299만장이었는데, 매년 200만장 가까이 늘고 있다. 전체 신용카드(휴면 카드 포함)가 매년 600만장 정도 느는 점을 고려하면, 신규 신용카드 세 장당 휴면 카드가 한 장씩 늘어나는 셈이다.
◇카드사들 매년 휴면 카드에 200억~300억원 투입
휴면 카드는 카드사나 소비자 모두에게 손해다. 카드사는 초기 상품 개발비를 포함해 마케팅·발급·배송 등에 드는 이른바 ‘매몰 비용’이 증가한다. 카드 업계에 따르면, 신용카드 1장을 발행해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데까지 드는 비용은 평균 1만원~1만5000원 정도다. 매년 휴면 카드가 200만장씩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카드사들은 연간 휴면 카드 발급에 200억~300억원 정도를 더 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국내 카드사가 부담한 카드 발급 비용은 2021년 2777억원에서 2023년 3193억원으로 400억원 넘게 늘었다.
카드사들은 휴면 카드로 생기는 비용을 주로 고객에게 걷는 연회비를 올려 충당한다. 10년 전만 해도 흔했던 연회비 2000~5000원짜리 카드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고, 현재 대부분 연회비가 1만원을 넘는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연회비를 올리면 쉽게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보니 굳이 공을 들여 휴면 카드를 없앨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실제 카드사들의 연회비 수익은 매년 1000억원씩 증가하고 있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2021년 1조1347억원이던 전체 신용카드사 연회비 수익은 2022년 1조2259억원, 2023년 1조3312억원으로 늘었다.
휴면 카드가 많으면 개인의 신용 평가가 낮아져 카드당 이용 한도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손해다. 카드사들은 카드를 세 장 이상 소지한 회원에 대한 이용 금액, 연체 금액, 이용 한도 등 카드 발급 관련 정보를 한국신용정보원에서 받는다. 이를 회원의 신용 평가에 활용하고 있다. 카드 수가 많은 경우 카드당 이용 한도가 낮게 책정될 수 있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여러 장의 휴면 카드를 그대로 놔두면 신용 평가가 낮아질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드사 경쟁에 체리피커 소비자 대거 양산
그럼에도 휴면 카드가 늘어나는 것은 카드사 간 치열한 외형 경쟁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카드사들은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쿠팡, 이마트, 올리브영 같은 특정 업체와 제휴해 발행하는 ‘상업자 전용 신용카드(PLCC)’를 내놓고 있다. 또 공격적인 현금 마케팅 등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른바 ‘체리피커 소비자(실속만 챙기는 소비자)’들이 필요한 혜택만 잠깐 쓰고 버리다 보니 휴면 카드가 대거 양산되고 있다.
휴면 카드를 자동 해지할 수 없도록 한 정부 정책도 휴면 카드 증가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엔 휴면 카드로 분류되면 고객이 한 달 동안 계약 유지 의사를 통보하지 않으면 이용 정지됐고, 이후 9개월이 지나면 자동으로 계약이 해지됐다. 하지만 나중에 휴면 카드를 다시 쓰려면 재발급 등 불편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정부는 휴면 카드라도 통상 5년인 유효 기간까지는 카드가 살아있도록 법을 바꿨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평소에는 연회비를 내지 않다가 필요하면 연회비를 내고 다시 살려서 쓰면 되는데 굳이 휴면 카드를 해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작년 9월부터 ‘내 카드 한눈에’ 서비스를 통해 자신의 휴면 카드를 한 번에 조회하고 해지하거나 되살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매달 이를 통해 휴면 카드를 해지하거나 되살리는 사용자는 1500여 명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