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 장기화와 트럼프발 관세 전쟁으로 한국 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해있지만 기업 경쟁력 강화와 국민 부담 완화를 위한 경제 살리기 법안들은 표류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11일 조세소위를 열고 주식시장 자금 공급을 늘리기 위해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 한도를 연 4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높이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논의했지만, 민주당 등 야당 반대로 법안이 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가 작년 7월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대책으로 내놓은 이 법안은 같은 해 11월 여야 잠정 합의로 ‘비쟁점 법안’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 파문에 따른 정국 혼란으로 작년 말 국회 통과가 무산된 데 이어, 조기 대선 전 마지막 국회가 될 수도 있는 2월 임시국회에서 야당이 입장을 바꿔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중도층 공략을 위해 ‘먹사니즘’ ‘잘사니즘’을 내세운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기업들의 자금 조달 통로인 증시 활성화를 위한 각종 세금 감면에 대해 ‘부자 감세’를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산업의 연구·개발 인력에게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인정하는 반도체 특별법과 적자투성이인 한국전력 대신 정부가 전력망 구축을 주도하는 전력망 확충 특별법 처리도 정치권 합의가 안 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법·에너지법… 野, 경제 활성화법 줄줄이 뭉갰다
밸류업 대책의 또 다른 축인 ‘주주 환원 촉진 세제’ 신설은 이날 조세소위에서 법안으로 상정되지도 못했다. 배당을 늘린 기업의 법인세와 배당받은 주주의 배당소득세를 모두 깎아주는 내용으로 민주당은 ‘부자 감세’라며 반대하고 있다. 밸류업은 해외 주요국에 비해 저평가받는 한국 증시를 살려 기업들의 자금 조달 숨통을 틔우고 주식에 투자한 개인들의 소득을 높이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가 작년부터 본격화한 정책이다.
◇여야 간사가 합의한 법안도 뒤집어
밸류업 법안 주요 내용은 작년 11월 여야가 잠정 합의한 내용으로 여야 간 쟁점 사안이 아니었다. 국회 기재위 소속 여야 간사는 작년 11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 혜택 확대를 포함한 세법 개정안 44개에 대해 잠정 합의했다. 하지만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면서 관련 논의가 중단됐고, 작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세법 개정안에도 잠정 합의된 내용들이 반영되지 못했다.
올해 들어 여당인 국민의힘이 “지금이라도 작년에 합의한 대로 세법을 개정하자”고 요구했지만 야당이 돌연 “간사 간 협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논의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향후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각종 현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세법에 어깃장을 놓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민주당은 밸류업을 위한 ISA 세제 개선안에 대해 “불필요한 부자 감세”라는 이유로 이날 통과를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른바 ‘서민 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당 관계자는 “작년 계엄 이후 민주당이 ‘탄핵’에 올인하면서 세법 협의도 중단됐는데, 이제 와서 ‘지연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니 궁색한 반대 논리를 들이미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재명 대표가 지난달 “올해를 자본시장 선진화로 ‘K디스카운트’가 해소되는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과도 모순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세소위 전날인 10일 이 대표는 22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당력을 총동원해 회복과 성장을 주도하겠다”며 무게 추를 회복·성장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재명 대표가 중도층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진보 진영의 ‘우클릭’ 논란까지 무릅쓰며 먹사니즘과 잘사니즘을 내세우는 행보를 보였지만, 구체적인 법안 처리를 놓고는 어깃장을 부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이날 44개 조항 가운데 민주당이 반대하거나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요구해 조세소위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이 12개에 달했다. 중소·중견기업 2·3세가 과도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가업 상속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배당이나 투자를 늘린 기업의 상속세 공제 한도를 600억원에서 1200억원으로 늘려주는 내용의 상속세및증여세법 개정안 논의도 이 가운데 하나다. 가업 상속 공제 확대 법안은 중견 기업의 밸류업 참여를 늘릴 유인책으로 기대를 모았다. 각종 밸류업 법안의 조세소위 처리가 무산된 이날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7일 거시 경제·금융 현안 간담회에서 “밸류업 지원 법안이 2월 임시국회에서 신속히 논의될 수 있도록 국회와 긴밀히 소통하겠다”고 밝힌 지 나흘 만이다.
◇반도체 특별법·에너지 3법도 ‘안갯속’
이재명 대표가 앞장서 처리하겠다고 한 반도체 특별법 등 산업 지원 법안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3일 정책 토론회에서 “1억3000만원 이상의 고소득 연구·개발자에 한해 유연성을 부여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에 공감한다”며 반도체 특별법의 쟁점인 52시간 예외 조항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노동계와 당내 반발로 이틀 만에 “반도체 산업 육성에 ‘주 52시간 예외’가 꼭 필요하느냐”고 말을 바꿨다. 정부·여당이 반도체 특별법과 함께 추진한 국가 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법, 해상 풍력 특별법 등 ‘에너지 3법’ 처리도 반도체 특별법을 둘러싼 주 52시간 논란으로 논의가 본격화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조세 체계 합리화 차원에서 추진해 온 상속세 개편 논의도 사실상 멈춰 섰다. 1997년부터 29년째 그대로인 10억원(일괄 공제 5억원+배우자 공제 5억원)인 공제 한도를 높여 상속세 부담이 집 한 채만 있는 중산층까지 번지는 일은 막자는 데 여야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하지만 정국 불안 장기화로 자녀 한 명당 한도를 5000만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하는 방식의 정부안은 물론이고 배우자 공제와 일괄 공제를 각각 10억원, 8억원으로 높이는 야당안 모두 답보 상태다.
☞IS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
통장 하나로 주식·채권·펀드·주가연계증권(ELS) 등 다양한 상품에 투자할 수 있어 ‘만능 통장’이라고도 불린다. 3년의 의무 가입 기간만 채우면 연간 수익 200만원(연봉 5000만원 이하는 400만원)까지 이자·배당소득세가 비과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