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014년 처음 3만달러를 돌파한 뒤 11년째 4만달러 벽을 깨지 못하고 있다.
5일 한국은행은 작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I가 3만6624달러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한국의 1인당 GNI는 2013년 2만8827달러에서 2014년 3만935달러로 올라선 뒤, 2021년 3만7898달러로 최고점을 찍었다. 2020년에는 코로나 팬데믹 충격으로 성장률이 9%쯤 뒷걸음질한 이탈리아를 넘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2022년 3만5000달러대로 떨어졌고, 이후 3만6000달러쯤에 머물고 있다.
오일 달러가 넘치는 중동 국가를 제외하고 인구 1000만명 이상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벽을 뚫은 나라는 10곳이다. 유럽의 영국·독일·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 등 6곳, 북미의 미국·캐나다, 아시아의 일본·호주 등이다. 이 나라들이 3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가는 데 평균 4.9년 걸렸다. 한국이 11년째 3만달러 박스권에 갇혀 있으니, 2배 이상 지체되고 있는 셈이다. 달러 기준으로 국민소득을 환산하기 때문에 최근의 달러 강세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다른 선진국과 달리 과감한 구조 개혁이나 혁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美·英, 혁신과 고부가 서비스 확대
미국 1인당 국민소득은 1997년 3만달러를 넘었고, 7년 뒤인 2004년 4만달러를 돌파했다. 2023년에는 주요국 중 처음으로 국민소득 8만달러 시대를 열 만큼 파죽지세다. 미국의 힘은 끊임없는 혁신이다. 미국 증시를 견인하는 빅테크 7사를 묶어 서부영화 ‘황야의 7인’의 영문명인 ‘매그니피슨트7(M7)’으로 부른다. M7인 애플(1976년 창립), 엔비디아(1993년), 메타(2004년), 알파벳(1998년), 마이크로소프트(1975년), 아마존(1994년), 테슬라(2003년)의 평균 연령은 33세일 정도로 젊다. 혁신 기업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미국에서는 IT, 바이오, 인터넷 콘텐츠 분야의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 왔다.
영국은 2002년 3만달러를 넘은 지 2년 만에 4만달러를 넘었다. 사라지는 제조업 일자리 대신 금융·서비스 분야에서 그만큼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낸 것이 비결이다. 지식 집약적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 비율을 확대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런던은 여전히 유럽 금융 중심지이며, 법률, 컨설팅 등 고부가 서비스 산업의 선두에 서 있다.
◇獨·북유럽, 노동 개혁과 복지 수술
1995년 3만달러를 넘어선 독일은 2년 뒤 2만달러대로 다시 미끄러졌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 났고, 연금 부담 등에 따른 재정 적자로 2001년에는 2만3000달러 선까지 밀렸다. 독일은 구조 개혁을 선택했다. 2002년 기간제 노동 계약 도입, 실업급여 수령 기간 단축, 장기 실업자 혜택 축소를 담은 개혁안 ‘어젠다 2010’이 마련됐다. 좌파 사회민주당 출신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입장에선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법인세율을 낮추고 구조 조정 속도를 올린 독일은 2003년 다시 3만달러, 2007년에는 4만달러 허들을 넘었다.
1990년 전후 일찌감치 3만달러 선에 도달한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3국도 중간에 고비를 겪었다. 1993년 세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일제히 2만달러대 중반으로 추락했고, 결국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부실 은행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세계 최고 수준이던 복지 제도도 손댔다. 실업 급여 수급 기한을 줄이고 노동 유연성을 높여 청년층과 중장년층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이런 노력으로 2000년대 중반 4만달러를 돌파해 순항하고 있다. 노조는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정부는 세율을 인하하고, 기업은 근로시간을 단축해 고용을 확대하는 노사정 대타협으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는 3만달러를 넘은 지 2년 만인 2005년 4만달러를 뛰어넘었다.
◇혁신 없이 주저앉은 일본
일본은 1992년 3만달러의 벽을, 2년 뒤인 1994년 4만달러 벽을 허물었다.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로선 세계 최초였지만 거기까지였다. 한때 5만달러 초반을 찍었지만,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며 3만달러대로 다시 후퇴했다. 혁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013년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선정한 ‘세계 50대 혁신 기업’에는 도요타(5위), 소니(11위), 혼다(18위), 소프트뱅크그룹(27위), 패스트리테일링(33위), 닛산자동차(38위) 등 일본 기업 6곳이 이름을 올렸다. 7년 뒤인 2020년에는 소니(9위), 히타치(29위), 도요타(41위) 3곳으로 줄었다. 기업들은 시대 변화에 맞춰 경쟁력을 높이는 데 늦었고, 일본 정부는 보호와 규제로 성장 정체를 방조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유력지 르피가로는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 ‘상상력·결단력 없는 정치인’ 등을 이유로 일본 경제에 대해 “마치 조종사 없는 비행기를 타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GNI·PGDI
GNI(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한 나라의 가계와 기업, 정부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전부 합한 것.
PGDI(가계총처분가능소득·Personal Gross Disposable Income): 가계가 소비나 저축에 사용할 수 있는 소득으로 임금이나 연금 등 가계소득에서 세금, 대출 이자, 각종 보험료 등을 빼고 계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