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의약품에도 최소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우면서 글로벌 제약업계가 대응 마련에 나섰다. 미국은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체결된 의약품 무역 협정에 따라 의약품과 그 생산에 사용되는 물질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무관세로 의약품의 가격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이후 미국 외 생산 시설에서 수입되는 완제 의약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아직 구체적인 관세 부과 대상과 방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국내외 제약·바이오 업계는 대응책 마련에 분주하다. 시장조사 업체 그랜드뷰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 제약·바이오 시장 규모는 지난해 6343억2000만달러(약 920조원)로, 압도적인 세계 최대 시장이다.

그래픽=백형선

◇美에 공장 짓는 다국적 제약사

트럼프 행정부는 반도체, 자동차, 철강 등 핵심 산업은 물론이고 의약품에 대해서도 미국에 생산 기지를 짓도록 압박하고 있다. 대부분의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는 완제품 생산 시설뿐 아니라 각종 약품의 성분이 되는 원료 의약품 생산 시설을 중국, 인도 등 저비용 국가들로 이전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들마저 해외 생산 비율을 높이면서 미국은 의약품 해외 수입 의존도가 크게 늘어났고, 의약품 부족 현상이 만성적인 문제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백악관에서 일라이릴리, 머크, 화이자 등 글로벌 빅파마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지 않으면 관세를 물게 될 것이라고 직접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관세 압박에 글로벌 빅파마들은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잇따라 밝히고 있다. 세계 시가총액 1위 제약사인 일라이릴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면담 직후 270억달러를 투자해 5년 내 가동을 목표로 미국 4곳에 제조 공장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라이릴리는 지난 2020년 이후 미국에 230억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번에 발표된 투자금을 합치면 총 500억달러를 투자하게 되는 셈이다. 일라이릴리는 “원료 의약품 제조, 공급망 강화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며 “제조 시설이 건설되면 엔지니어, 과학자 등 약 3000개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투자 발표에 대해 “대통령이 바랐던 일을 정확히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제약사 머크는 지난 11일 10억달러를 투자한 백신 제조 공장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열었다. 머크는 아일랜드, 싱가포르 등 국가에 생산 시설을 두고 있고 매출 상당수가 미국 외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을 염두에 두고 미국 내 생산 시설을 개소했다고 밝힌 것이다. 머크의 캐럴라인 리치필드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향후 수년간 미국에 80억달러를 더 투자할 예정”이라며 “적절한 방식으로 미국 생산을 지원할 수 있는 민첩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 역시 관세 부과를 피하기 위해 해외 제조 시설을 미국으로 이전할 수 있다고 이달 초 밝혔다. 그는 “우리는 미국에 제조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제조 현장은 현재 양호한 용량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무슨 일이 생긴다면(관세가 부과된다면) 미국 외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화이자는 미국에 10개의 제조 공장과 2개의 유통 센터를 보유하고 있다.

빅파마들은 관세가 부과되기 전에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국바이오협회가 미국 인구조사국과 경제분석국의 1월 수출입 실적을 분석한 결과, 지난 1월 미국의 의약품 수입액은 약 282억8500만달러였다. 전월(약 230억달러) 대비 약 23%, 작년 1월(약 182억달러) 대비 약 55% 늘어난 수치다. 한국바이오협회는 “수입 관세 부과 계획 발표에 대응해 1월에 미국 및 해외 기업들이 단기적으로 미국 내 큰 물량의 재고 확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발표될 관세 부과 정책에 따라 미국 내 생산 기지 확보에 대한 본격적 검토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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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바이오도 고심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대응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국내 의약품 수출액은 지난해 84억8361만달러였는데, 이 중 대미(對美) 수출액은 15억364만달러(18%)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 특히 국내에서 완제 의약품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들의 경우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셀트리온은 주주 서한을 통해 “미국에서 판매 중인 제품은 2025년 3분기까지는 현지에서 조달이 가능한 충분한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며 “관세가 지속될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가 부과되는 완제 의약품보다 관세 부담이 낮은 원료 의약품 수출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했다. 미국 시장에서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를 판매하고 있는 SK바이오팜은 국내에서 원료 의약품을 제조 후, 캐나다에서 패키징 등을 거쳐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미국 내 생산 전략을 수년 전부터 추진해왔다”며 “생산 기술 이전, 공정 검증 등을 거쳐 2024년 하반기 미국 FDA 승인을 받았다”고 했다.

한국바이오협회는 “미국 내 병원 및 제약 업계의 우려에도 미국이 실제로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할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수입량 의존도가 높은 원료 의약품을 관세 부과 대상으로 할지, 모든 의약품을 대상으로 할지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