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필수 추경’ 카드를 꺼낸 것은 역대 최악으로 번진 영남권 산불 피해가 가뜩이나 취약한 올해 한국 경제에 끼칠 충격을 줄이려는 것이다. 야당의 전 국민 25만원 민생 지원금이나 여당의 소상공인 1인당 100만원 바우처 지급처럼 여야 의견 차가 큰 쟁점은 제외하고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산불과 통상, 민생 등 3대 분야에서 추경 10조원만 최소한으로 편성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추경 규모와 관련, 여당은 소상공인 바우처 등 10조∼15조원을, 야당은 민생 지원금을 포함한 35조원 규모를 주장해 왔다.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내수 부진 장기화와 미국발 관세 전쟁 불확실성에 휘말려 1%대 중반까지 떨어졌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산불 피해 극복, 민생의 절박함과 대외 현안의 시급성을 감안하면 ‘필수 추경’을 빠른 속도로 추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며 “여야가 필수 추경의 취지에 ‘동의’해 준다면 정부도 조속히 관계 부처 협의 등을 진행해 추경안을 편성·제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여야의 동의를 추경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여야 이견 사업이나 추경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의 증액이 추진된다면 정치 갈등으로 국회 심사가 무기한 연장되고 추경은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없게 된다”며 “4월 중에 추경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여야의 초당적 협조를 요청한다”고 했다.
정부는 4월 초순까지 부처별 의견을 받아 중순쯤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목표대로 4월 안으로 추경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경우 코로나 극복과 민생 안정을 위한 62조원 규모 추경이 편성된 2022년 5월 이후 3년 만에 추경이 편성된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31일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추경안 관련 협의에 나설 계획이다. 변수는 대규모 추경 편성을 주장해 온 야당 입장이다. 민주당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만시지탄”이라면서 “10조라는 추경 규모가 당면한 위기에서 민생과 경제를 회복시키고 재난을 극복하는 데 유의미한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고 했다. 추경 편성 필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선 “민주당이 민생 지원금을 추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정부의 필수 추경안을 여야가 받아들일 경우 사상 처음으로 조(兆) 단위 산불 추경을 편성하게 된다. 종전 역대 최대 산불로 꼽힌 2000년 동해안 산불 당시 정부와 국회는 2조2000억원대 추경을 편성했지만, 대부분 저소득층 생계 안정에 투입됐고 초대형 헬기와 무인 감시 장비 등 산불 진화·감시 장비 구입 예산은 300억원만 포함됐다. 2022년 3월 울진·삼척 산불 두 달 뒤 편성한 코로나 극복과 민생 안정 추경에도 산불 대응 예산 105억원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