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불붙인 관세 전쟁이 세계 금융시장을 공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의 34% 상호 관세에 중국이 34% 맞불 관세와 함께 희토류 수출 통제 등 보복 조치를 발표한 여파로 7일 아시아 증시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최악 폭락장을 맞았다.
한국 코스피는 개장 초반 5% 넘게 급락해 5분간 프로그램 매매가 정지되는 사이드카를 발동했다. 종일 투매에 시달린 끝에 코스피는 직전 거래일보다 5.57%, 코스닥은 5.25% 하락 마감했다. 일본 닛케이평균도 7.83% 급락한 채 거래를 마쳤다.
중화권 증시는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지난주 목·금 청명절 연휴로 거래가 없다가 이날 문을 연 탓에 충격을 한꺼번에 받았다. 대만 자취안지수는 9.7% 폭락했고 홍콩 항셍지수는 13.22%, 중국 본토 상하이종합지수도 7.34% 떨어졌다. 홍콩의 이날 하루 주가 하락 폭은 2008년 금융 위기 때보다 컸다.
이어 개장한 유럽 주요국 증시는 장중 3~6%대 하락세를 보였고, 뉴욕 증시도 연이어 급락세로 출발했다. S&P500은 개장 초반 4%대 하락하며 5000선이 무너졌고, 기술주 위주의 나스닥지수 역시 4%대 하락에 1만5000선이 깨졌다.
세계 증시가 몸살을 앓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6일 플로리다에서 워싱턴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아무것도 떨어지길 바라지 않지만, 때로는 약을 먹어야 뭔가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이 무너지고 있어도 미국의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 전쟁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7일 연례 주주 서한을 통해 ”동맹국들과의 경제적 분열은 장기적으로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 문제(관세)를 빨리 풀어야 한다. 관세의 부정적 영향이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적으로 증가하고 역전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수출로 먹고사는 아시아 국가들 큰 타격… “경제 핵겨울 온다”
지난 3~4일 이틀간 뉴욕 증시가 10% 안팎 급락한 뒤 주말이 지난 7일 아시아에도 기록적 패닉 셀(공포심에 따른 투매)이 이어진 것은 미국발 관세 전쟁이 ‘엄포’가 아닌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보복 관세와 기업 제재 등 조치를 들고나오면서 ‘G2(주요 2국)’가 전면전으로 치닫는 데다, EU(유럽연합)와 캐나다 등 주요국도 보복 조치를 예고하고 있다.
알레테이아 캐피털의 빈센트 찬 중국 전략가는 블룸버그에 “지난 90년간 지속돼 온 글로벌 무역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며 “경제적 영향이 얼마인지, 시장의 바닥이 어디인지 예측하기가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수출로 먹고살던 아시아, 관세 전쟁에 피 흘렸다
이날 국내 유가증권 시장에서 외국인은 2조915억원을 순매도했다. 외인은 코스피200선물 시장에서도 1조1819억원어치를 매도하는 등 현·선물 합계 3조2734억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역대 다섯째로 큰 외국인 매도세다. 삼성전자(-5.17%), SK하이닉스(-9.55%), 현대차(-6.62%), 기아(-5.69%) 등 시가총액 상위 수출주가 빠짐없이 하락했다. 관세 전쟁의 ‘피난처’로 꼽히던 한화에어로스페이스(-8.55%), HD현대중공업(-8.17%), 한화오션(-9.81%) 등 조선·방산 업종도 투매를 피할 수 없었다.
그간 비교적 양호하게 버티던 중화권 증시에서도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텐센트와 알리바바, 샤오미 등 중화권 테크 대장주들이 이날 장중 12~20%까지 급락세를 보였다. 홍콩 항셍지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의 하루 최대 낙폭(-12.7%)을 넘어선 13.22% 하락 마감했다.
관세 전쟁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성장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그간 안전 자산으로 각광받던 금 가격도 꺾이기 시작했다. 구리와 유가 등 원자재 가격뿐 아니라 비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도 급락했다. 위험 자산 투자를 피하려는 글로벌 자금이 대피할 피난처가 사라진 것이다.
◇주가 급락에도 아랑곳 않는 트럼프 “때로는 약 먹어야”
“수술이 끝났다. 환자는 살았고 회복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상호 관세 발표 이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썼지만, 환자(미국 경제)는 지금 과다 출혈로 위험하다.
그럼에도 그와 정부 핵심 인사들은 관세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뜻을 재차 밝히고 있다. 6일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여러 지도자와 통화했다고 말하면서, 목표는 무역 적자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리는 중국을 상대로 한 무역 적자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악관 내부에서 월가의 입장을 반영해 줄 것으로 인식되던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도 이날 NBC 인터뷰에서 “나는 경기 침체가 반드시 발생한다는 가정은 부정한다”며 주식시장 폭락을 ‘조정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핵겨울이 온다“ ”역사상 가장 큰 자해"
월가의 거물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관세 폭주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세계적 투자 전략가 제러미 시겔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관세 정책이) 1930년대 대공황을 악화시킨 ‘스무트-홀리 관세법’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미국 역사상 약 95년 만에 가장 큰 정책 실수가 나왔다. 관세 여파로 당분간 시장에 폭풍우가 닥칠 것”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던 헤지펀드계 거물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경제 핵전쟁(economic nuclear war)을 벌인다면 투자는 멎을 것이고, 소비자는 지갑을 닫을 것이고, 미국의 평판은 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기업 리더들에게서 신뢰를 잃고 있다. 우리가 이러려고 트럼프에게 투표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트럼프가 (관세 부과를 연기해)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는 경제적 핵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역사상 미국 경제에 가한 가장 큰 자해”라면서 “소비자 손실까지 합치면 30조달러(약 4경4000조원) 정도가 관세에 따른 합리적 (타격) 추정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