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규

김종호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감사원 사무총장과 청와대 민정수석 등 요직을 거쳐 문 정부 말인 2021년 11월 임명됐다. 그는 지난해 11월로 3년 임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후임 인선 절차가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이다. 대부분 공공기관장은 관련 법률과 정관에 따라 임기가 끝나더라도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현직을 유지하도록 돼있다.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은 연봉이 약 2억9000만원으로 정치인·관료 출신들이 선호하는 자리다. 조기 대선일인 6월 3일까지 공공기관장 인사가 미뤄질 경우 김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 차기 정부 등 3개 정부에서 모두 일하게 된다.

김 이사장처럼 문 정부에서 임명돼 3년 임기가 끝났지만 여전히 현직을 유지하는 기관장이 2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8일 본지가 기업 정보 업체 리더스인덱스와 함께 공공기관 339곳(부설 기관 12곳 포함)을 전수 조사한 결과다. 강원랜드·공영홈쇼핑 등 기관장이 공석인 경우가 30곳, 윤석열 정부가 임명한 기관장이 280명이다.

친(親)정권 인사로 채워지는 공공기관장이 3대 정권에 걸쳐 재임하는 기록이 세워지는 것은 문 정부가 정권 말 알박기 인사를 많이 한 데다, 윤 전 대통령이 공공기관장 임기보다 짧은 2년 11개월 만에 파면됐기 때문이다.

◇알박기 기관장들의 버티기

20대 대통령 선거 한 달 전인 2022년 2월 임명된 김제남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도 대표적인 문 정부 알박기 사례다. 환경운동가 출신인 김 이사장은 문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일하며 탈원전 정책에 앞장섰다. 그는 윤 정부 들어서도 사퇴를 거부하고 지난 2월까지 임기를 채웠고, 지금도 이사장 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픽=김성규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문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지낸 정기환 마사회 회장은 2022년 2월 취임 이후 3년 1개월 동안 경영평가 등급 하락, 상임감사 시절의 ‘황제 승마’ 논란 등으로 수차례 구설에 올랐다.

일부 알박기 기관장들은 각종 비위로 물의를 빚었다. 2021년 5월 임명된 조용돈 전 가스기술공사 사장은 내연 관계 여성과 해외 출장을 6차례 다녀오고 회사 공용 물품을 사적으로 쓰다가 작년 5월 해임됐다. 김성암 한국전력기술 사장은 임기 말인 작년 5월을 전후해 무리한 조직 개편과 인사를 단행해 논란이 됐고, 근무 태만과 각종 비위가 적발됐다. 조직 내홍으로 김 사장이 핵심 사업인 체코 원전 관련 국제 행사의 초청 대상 명단에서 빠지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사회는 지난해 10월 김 사장 직무를 정지했다. 하지만 후임 인선 지연으로 6개월째 사장 직무급을 제외한 기본급을 받고 있다.

◇文·尹·차기 정부 인사 공존하나

오는 6월 4일 차기 정부가 출범하면 문 정부가 임명한 29명과 윤 정부 때 취임한 280명, 차기 정부의 낙점을 받은 기관장들이 공존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윤 정부가 임명한 280명 중 37명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윤 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작년 12월 14일 이후 임명됐기 때문에 차기 정부에서 ‘윤 정부 알박기’ 인사로 몰릴 가능성이 높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현재 공석인 30개 기관장 가운데 일부에 대해 정식 임명 재가를 할 경우 이 규모는 더 늘어난다. 가스기술공사 사장직에는 지난 대선에서 윤 전 대통령 측 대전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이은권 전 국민의힘 의원이 내정된 상태로, 한 대행의 재가 여부와 시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래픽=김성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알박기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는 공공기관장과 백악관 참모직을 여야 합의로 정리한 미국의 ‘플럼북(Plum Book·자두색 표지의 책자)’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상대편이 알박기할 때는 비판하면서, 알박기했던 자기편을 물러나라고 하면 외압이라고 하는 악순환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