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엔당 970원에 엔화 팝니다.”
일본 여행을 자주 가는 A씨는 지난 8일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에서 이런 게시물을 보고 바로 채팅으로 말을 걸었다. 전날 100엔당 원화 환율이 2년 만에 1000원을 넘어섰는데, 엔화를 싸게 판다니 혹한 것이다. 그런데 판매자가 “먼저 입금을 하면 우리 집 문고리에 엔화를 넣어 걸어 놓겠다”고 했다. A씨가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자 ‘사기 의심 번호’라는 문구가 떴다. 엔화 가치가 오르자 이런 사기 행각까지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에 약세를 보여왔던 엔화는 연초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관세 부과를 발표하자 안전 자산으로 부각되면서 강세로 돌아섰다. 달러당 150엔대이던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최근 146~147엔에서 움직였다.
9일 엔화 대비 원화 환율은 100엔당 1020.91원(오후 3시 30분 기준)으로 2022년 3월 17일(1022.27원) 이후 3년여 만에 가장 높은 수준(원화 약세, 엔화 강세)을 보였다. 엔화 가치가 ’100엔당 1000원’을 넘나들자 국내에선 예전에 없던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엔화를 미리 환전했던 사람들은 차익 실현에 나서고, 봄철 일본 여행을 앞둔 사람들은 몇 푼이라도 더 싸게 엔화를 살 궁리를 하고 있다.
◇엔화 예금 일주일 만에 500억엔 빠져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지난달 말 9266억엔에서 지난 7일 8701억엔으로 일주일 사이 565억엔(약 5600억원)이 빠져나갔다. 올해 1월 말(1조692억엔)과 비교하면 2000억엔 가까이 줄어들었다.
지난해 상반기 100엔당 850원대에서 ‘엔테크(엔화+재테크)’에 나섰던 투자자들이 엔화 가치가 상승하자 이익 실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당시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작년 6월 역대 최대인 1조2929억엔까지 불어났고, 올해 1월 말까지 17개월 연속 1조엔을 웃돌았었다.
◇일본서 뽑아온 현금, 명동서 바꾸기도
지난주 일본에 다녀온 B씨는 일본 현지 현금인출기(ATM)에서 엔화 현금으로 15만엔을 뽑아 왔다. 트래블 카드에 넣어놨던 돈이지만, 엔화 가치가 오르자 현지에서 인출한 것이다. 원화를 외화로 환전해 전용 외화 통장에 넣어놓고 이를 해외에서 카드로 결제하는 트래블 카드는 대부분 현지 출금 수수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래블 카드에 남은 외화를 앱에서 원화로 바꿀 때는 수수료가 붙거나, 수수료가 없어도 환율이 불리하다. B씨는 “이왕이면 10원이라도 더 쳐주는 서울 명동 환전소를 찾아가려고 현금을 대량으로 뽑아왔다”며 “다 해서 2만원 정도 더 받을 수 있어 교통비는 나오는 셈”이라고 했다.
반면 이달 중순 일본 오사카로 가족 여행을 가려던 C씨는 “주변에서 하도 제주도보다 일본이 싸다고 하길래 일찌감치 표를 끊었다”며 “그런데 엔화 가치가 올라 4인 경비로 따지니 생각보다 예산이 많이 들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엔화가 비싸지자 일본 여행 수요도 줄고 있다. 10일 교원투어에 따르면 다음 달 초 황금 연휴(5월 1~6일) 출발 기준 일본 여행 예약은 작년보다 45% 줄었다. 지난해 베트남·유럽에 이어 3위였던 여행지 예약 순위도 태국·중국에 밀려 5위로 떨어졌다.
◇100엔당 990원에 ‘환전 러시’
작은 환율 변동에도 환전이 급격하게 느는 일도 벌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뺀 모든 국가에 90일간 상호 관세를 유예하겠다고 하자, 9일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148엔까지 뛰며 엔화 가치가 다소 떨어졌다. 이에 10일 국내에서 100엔당 원화 환율도 980~990원대에서 움직였다.
그러자 이날 새벽 엔테크족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실시간 환율이 아직 반영되지 않아 아직 100엔당 1010원대인 은행의 모바일 앱에서 엔화를 원화로 바꾼 뒤, 실시간 환율이 반영되고 있는 다른 은행 앱에서 100엔당 980원대에 엔화를 사들여 단타로 환차익을 노리기도 했다. 이날 일본 여행 커뮤니티에서는 “눈치 보다 출국 직전 겨우 환전했다”는 후기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