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미국의 원조로 국내에 처음 도입된 연구용 원자로 1호기(트리가 마크2). 이 원자로를 중심으로 국내 원자력 인력들이 양성됐다./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이 원자력 종주국인 미국에 연구용 원자로를 수출하기까지 ‘K원자력’ 기술 발전의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6년 7월, ‘세계 전력계의 대부’로 불렸던 워커 시슬러 디트로이트 에디슨 전기회사 회장이 방한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우라늄 샘플과 석탄이 담긴 작은 나무 상자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우라늄 1g만 있으면 석탄 3t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석탄이 땅에서 캔 에너지라면,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에너지다.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는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

시슬러 말에 감응한 이 대통령은 바로 원자력 연구와 원전 건설을 추진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65달러밖에 안 될 때다. 국비 유학생으로 200여 명을 뽑아 미국·영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1959년 1월엔 원자력원을 창설했다. 같은 해 7월엔 미국의 외교 원조 등으로 국내 처음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 1호기(트리가 마크2)를 착공했다. ‘트리가 마크2′는 국내 원자력 연구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 원자로를 중심으로 국내 연구진들은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 중성자 활용 같은 각종 실험을 수행했다. 이렇게 배출된 ‘1세대 원자력 인력’은 이후 한국 원전 산업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본격적인 원자력 산업 발전이 시작된다. 1971년 한국 최초 원자력발전소 고리 1호기 공사를 시작했다. 고리 1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 노형(爐型)을 채택했다. 이후 캐나다 캔두형(월성 1호기), 프랑스 알스톰형(한울 1·2호기) 등을 차례로 건설하면서 한국은 원전 강국들의 기술을 습득, 자립을 위한 단계를 밟아 나갔다.

1980년대엔 ‘원전 기술 국산화’를 시작한다. 현대건설이 1978년 착공한 고리 3·4호기는 원전 기술 국산화율을 95%까지 끌어올렸다. 1989년 착공된 한빛 3·4호기는 최초의 100% 한국형 원전으로 평가받는다.

2009년은 한국형 원전 기술을 해외로 처음 수출한 역사적인 해다. 2009년 3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전력기술 컨소시엄이 그리스에 연구용 원자로 시스템을 수출했고, 같은 해 12월엔 한국형 원자로 APR1400을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했다. 연구용 원자로와 상업용 원전 수출에 모두 성공한 것이다.

2024년엔 원전 강국인 프랑스와 미국을 제치고 체코에서 사업비 24조원 규모의 신규 원전 2기를 짓는 사업을 따내는 쾌거도 이뤘다. UAE 바라카 원전 수주 이후 1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