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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3대 엔진인 소비·투자·수출이 모두 뒷걸음질 쳤다. 한국은행은 올해 1분기(1~3월)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0.2%로 집계됐다고 24일 밝혔다. 1분기는 트럼프발 관세 충격이 본격화하기 전인데도 내수와 수출이 모두 무너진 것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해 2분기 마이너스 성장(-0.2%) 이후 3분기(0.1%)와 4분기(0.1%)에도 제대로 반등하지 못하다가 다시 역(逆)성장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래픽=정인성

분기 성장률이 4개 분기 연속 0.1% 이하를 기록하며 회복력을 상실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2020년 코로나 사태 때도 없었던 일이다. 이전 위기 때는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가도 4번째 분기에는 반등했었다.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전반적인 내수 수요 부진과 성장 잠재력 약화 등 경제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비상계엄 사태, 여객기 참사, 대형 산불 등 각종 악재가 겹친 탓이다.

그래픽=양진경

계엄 이후 급격히 위축된 소비는 1분기에도 살아나지 못했다. 민간 소비는 오락문화·의료 등 서비스 부문의 부진이 도드라지며 전 분기보다 0.1% 감소했다. 건설투자와 설비투자는 각각 3.2%, 2.1% 쪼그라들었다. 설비투자의 경우 2021년 3분기(-4.9%) 이후 3년 6개월 만에 가장 큰 감소 폭이다. 수출도 화학·기계부품 부진으로 1.1% 줄었다.

2분기 상황이 개선된다는 보장도 없다. 아직 관세전쟁이 본격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미 CNBC 인터뷰에서 “무역 긴장이 한국 경제에 맞바람으로 작용하며, 경제 성장 하방 위험이 커졌다”며 “지금은 마치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소비·투자·수출 ‘3대 엔진’ 다 꺼졌다… 외환 위기 때보다 심각

1분기 한국 경제 성장률을 가장 크게 끌어내린 부문은 건설투자다. 이 기간 건설투자는 3.2% 줄며 4개 분기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1분기 전체 경제성장률을 0.4%포인트 갉아먹었다. 국내총생산(GDP)의 15% 정도를 차지하는 건설업의 부진은 철강·시멘트 등 건자재뿐 아니라 이사서비스업, 인테리어업, 음식업 등 다른 연관 산업의 부진을 동반한다.

게다가 건설업 취업자 상당수가 일용직이라는 점에서 건설업 부진은 내수 침체를 가속화한다. 3월 건설업 취업자 수는 193만2000명으로 전년보다 18만5000명 줄었다. 건설업 취업자는 지난해 5월(-1만4000명) 이후 11개월 연속 줄어들고 있다.

24일 오전 서울 남구로역 인근 인력시장에서 만난 한 인력업체 관계자는 “작년만 해도 ‘일당 20만원 안 주면 안 나가’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일만 있다면 10만원대에 군소리 없이 일을 나간다”며 “예전에는 ‘내년 언제쯤이면 경기가 나아진다더라’는 얘기들을 하곤 했는데, 작년부터는 아무도 앞으로 경기가 나아질 거란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력시장 인근 백반집 사장은 “원래 저녁에 일 마치면 술 사 먹는 게 일상인데, 요샌 손님들이 절반도 안 온다”고 했다.

기업들의 체감 경기도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24일 발표한 4월 기업경기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업심리지수가 87.9를 기록했다. 이 지표가 100을 웃돌면 경기 전반에 대한 기업 심리가 낙관적이라는 뜻이고, 반대로 100을 밑돌면 비관적이라는 뜻이다. 기업 심리는 2022년 10월(98.6)을 기록하며 비관 국면으로 돌입한 뒤, 2년 7개월간 단 한 번도 100을 넘지 못했다. 경기 시화공단의 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업체들을 방문해 보면 아파트형 공장엔 문이 꽉 닫혀 있고 인기척이 안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며 “업체들 사정이 어렵다 보니 이자 비용에 더 민감해졌고, 은행 대출 영업도 힘들어졌다”고 했다.

그나마 경기 버팀목 역할을 해 왔던 수출도 1분기 성장률 지탱에 실패했다. 엔비디아 인공지능(AI) 가속기 발연 문제로 최신 AI칩 주문이 연기되면서 한국 기업의 고사양 반도체 수출 실적이 예상보다 악화했다.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인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전체 자동차 수출 물량 중 미국으로 가는 물량이 90% 가까운 한국GM 같은 경우에 공장 폐쇄되면 어쩌냐는 말이 협력업체들 사이에서 나오는 수준”이라고 했다.

◇소비·투자·수출에 정부 지출마저 감소

경기 둔화 국면에서 정부 소비까지 함께 줄어드는 일은 드물다. 소비가 위축되고 투자가 쪼그라들면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1분기에는 정부 소비(-0.1%)도 전기 대비 후퇴했다. 통계 작성이 시작된 지난 1960년 2분기 이후 민간 소비, 건설·설비 투자, 수출뿐 아니라 정부 소비까지 5가지 부문이 죄다 전기 대비 쪼그라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가 올해 1분기 재정·공공기관·민간투자 집행액을 전년보다 4조2000억원 늘리고, 계엄 사태 이후 내수 진작을 위한 조기 집행을 공언했지만 경기 침체를 방어하지는 못했다. 한은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 소아·청소년 사이 유행했던 백일해 등 전염병이 올 들어 진정되면서 정부 소비로 잡히는 건강보험료 급여비 지출이 줄어든 영향도 있다”고 했다.

1분기 -0.2% 성장 성적표는 한은의 지난 2월 공식 전망치(0.2%)보다 0.4%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도 한은이 전망한 1.5%보다 크게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최근 IMF가 경제 전망에서 미국으로부터 145% 관세를 부과받은 중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은 0.6%포인트 내렸는데, 한국 성장률 전망은 1%포인트 내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사실상 경기가 ‘자유 낙하’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