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입법 예고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안(案)이 사업장마다 산업보건의를 필수적으로 채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산업보건의 자격을 가진 의사보다 대상 사업장 수가 6배 이상 많아 산업보건의를 채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시행령안은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는 내년 1월부터 광업·건설·화학제조 등 일부 업종의 50인 이상 사업장에 산업보건의를 배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기업활동 규제완화 특별조치법에 따라 실제 적용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대재해법은 특별조치법의 적용 대상에 해당한다는 법규가 없기 때문에 기업들은 내년부터 산업보건의를 최소 1명씩 사업장에 배치해야 한다.
◇산업보건의는 690명인데 뽑아야 할 기업은 4664곳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법안 검토 보고서를 토대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전국 50인 이상 사업체(5만1000여 개) 중 산업보건의를 채용해야 하는 업종의 사업장은 2017년 기준 4664곳이다. 반면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현재 활동 중인 산업보건의 수는 280여 명에 불과하다. 범위를 넓혀 2018년 산업보건의 자격을 갖춘 직업환경의학·예방의학 전문의를 다 따져도 각각 509명, 181명에 그친다. 1개 기업이 최소 1명의 산업보건의를 채용한다고 하더라도 약 4000개 업체는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산업보건의를 채용할 여력이 안 되는 업체도 많다. 양옥석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행정 업무를 보는 직원도 부족한 중소기업이 대다수인데 산업보건의까지 채용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채용을 하려고 해도 지방 중소기업에 오겠다는 의사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중대재해법 시행령안은 또 내년부터 사업장에 안전관리자와 보건관리자를 각각 배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기업 현실을 감안해 안전보건관리 업무를 전문기관에 위탁할 수 있도록 규정했는데 중대재해법에는 위탁 규정이 없고, 산안법의 위탁 규정을 중대재해법에 준용할 수 있다는 규정도 없다. 이에 따라 광업·의약품제조·기계제조와 같은 안전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업종의 50인 이상 사업장은 내년부터 안전·보건관리자도 따로 채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규정 또한 준수가 어려운 상황이다. 산자위 법안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9월 기준 안전관리자를 선임한 2만1320업체 중 안전관리자를 직접 고용한 업체는 23.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문기관에 위탁하고 있다. 보건관리자를 선임한 1만9317업체 중 직접 고용한 사업장도 23.5%뿐이다. 만약 시행령안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기업들은 올해 안에 3만여 명의 안전·보건관리자를 신규 채용해야 하는 셈이다. 고용부는 현재 안전·보건관리자 자격이 있는 인력이 몇 명인지 정확한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경총 관계자는 “안전·보건관리자를 채용할 경우 중소기업은 매년 최소 6000만~7000만원 정도의 비용을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면서 “중소기업 중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재해 나면 경영자는 무조건 안전교육 받아야
기업들은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사고 원인이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확정되기도 전에 경영자에게 무조건 최대 20시간의 안전 교육 수강을 강제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수도권 산업단지의 한 중소기업 대표는 “매일 회사를 꾸려나가는 것도 버거운데 부상자나 질병자가 나오기만 하면 회사 일을 중단하고 계속 교육을 받으러 다니라는 뜻이냐”고 말했다. 전승태 경총 산업안전팀장은 “정부는 법부터 시행해보고 추후 시행 과정에서 문제가 실제 발생하면 고치자는 입장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이 입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이 같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입법 예고 기간에 접수했고, 향후 시행령이 공포되기 전까지 법안 수정 여부를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시행령안은 이르면 다음 달 말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