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동을 목표로 원전 1기를 건설 중인 터키 정부는 최근 2기의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원전 업계에선 러시아 국영 원전 회사 로사톰(Rosatom)이 건설을 맡을 것으로 전망한다. 현재 짓고 있는 터키 아쿠유 원전을 로사톰이 건설 중인 데다, 러시아 정부가 앞장서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9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러시아의 신규 원전 건설 참여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혔다.
탄소 중립과 급증하는 전력 수요 대응을 위해 외국 정부들이 원전 건설을 추진하면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위축됐던 글로벌 원전 시장이 다시 열리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원전 건설 물량은 자국과 해외에서 꾸준히 원전을 건설해 온 러시아와 중국 기업들이 휩쓸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전통의 원전 강국인 영국·미국·프랑스도 미래 원전인 소형 모듈 원자로(SMR) 개발에 나서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축적해 온 한국은 현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원전 산업 인프라가 무너지면서, 원전 주변 기기를 납품하는 하청 업체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중국이 세계시장 장악
로사톰의 알렉세이 리카체프 사장은 최근 “2035년까지 대형 신규 원전 10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사톰은 지난해 총 5240억루블(약 8조7000억원)을 원전에 투자했고, 올해 7710억루블(약 12조8000억원), 내년엔 1조2000억루블(약 20조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로사톰은 중국·우크라이나·이란·인도·벨라루스 등 5국에서 10기의 원전을 운영 중이고, 중국·인도·방글라데시·터키·이란 등 6국에서 11기의 원전을 건설 중이다. 또 중국·아르메니아·이집트·핀란드·이란·터키 등 6국에서 10건의 원전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주한규 서울대 교수는 “로사톰은 뛰어난 기술력에 러시아 정부의 막강한 외교적·재정적 지원을 등에 업고 글로벌 원전 시장을 장악해 가고 있다”며 “현재 세계 원전 시장에서 기술력과 영향력 면에선 로사톰이 세계 최강”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국영 원전 기업인 중국광핵집단(CGN)과 중국핵공업집단(CNNC)을 앞세워 자국 내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올 상반기에만 신규 대형 원전 6기를 착공해 현재 18기의 원전을 건설 중이다. 중국 국영 원전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내세워 세계 원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중국 원전 건설 비용은 kW당 3000달러(약 354만원)로, 미국·프랑스 건설 비용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중국은 파키스탄에서 원전을 건설 중이며 루마니아·아르헨티나·케냐 등 세계 37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수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롤스로이스·누스케일 등 SMR 개발
영국·미국·프랑스는 SMR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항공기 엔진 기업 롤스로이스는 민간과 정부로부터 총 4억5000만파운드(약 7100억원)를 지원받아 SMR 개발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롤스로이스는 최소 16기의 SMR을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SMR 최초로 작년 9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마친 미국 누스케일사(社)는 루마니아에 첫 SMR을 건설키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설립한 원전 기업 테라파워는 버핏 소유의 전력 회사 퍼시피코프와 함께 와이오밍주의 한 폐쇄 석탄 공장 부지에 SMR ‘나트륨’을 건설할 예정이다. 프랑스 전력공사는 2030년부터 수출용 SMR인 ‘뉘와르(Nuward)’를 개발해 대형 원전 시장에서 잃었던 시장 지배력을 되찾겠다는 계획이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경제성을 자랑하는 원전 기술을 가지고도 탈원전 여파로 해외 수주에서 밀릴 우려가 크다. 한국이 독자 개발한 신형 원자로(APR1400)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 인증을 받은 데다 건설 비용도 저렴하지만, 국내 탈원전 여파로 해외 수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차세대 원전인 SMR도 개발은 하되 수출만 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국내에서는 짓지도 않으면서 다른 나라에 수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탈원전 정책으로 세계 최고 원전 기술이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