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낸드 플래시 반도체에서 세계 1위로 도약한 배경에는 2001년 8월 고 이건희 회장의 ‘자쿠로 결단’이 있다. 당시 낸드플래시 세계 1위 기업인 일본 도시바가 삼성에 제휴 제안을 하자, 이 회장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황창규 메모리반도체 총괄사장 등 주요 사장들을 급히 일본의 샤브샤브 음식점 ‘자쿠로’로 호출했다. 이 회장은 “독자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도시바를 앞설 수 있다”는 황 사장의 말을 듣고 독자 추진을 결정했다. 당시 도시바의 시장점유율(45%)이 삼성의 2배에 달하고 원천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회장은 도박에 가까운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후 삼성은 낸드플래시 분야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해 2년 만에 도시바를 앞질렀고, 20년 넘게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파운드리에서는 삼성 특유의 공격적인 투자를 할 결정적인 시기를 놓쳤다.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데 이어 2016년부터는 이재용 회장, 최지성 부회장 등 삼성의 수뇌부가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리면서 2021년까지 무려 5년 가까이 수감과 재수감을 반복하며 법적 리스크에 시달렸다. 이 사건 여파로 삼성그룹은 그룹 전체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을 전격 해체하고, 최지성 실장(부회장)을 비롯한 팀장(사장급)들이 모두 퇴사했다. 삼성전자의 전 사장은 “총수가 아니면 신사업에 손실을 감수하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기는 힘들다”면서 “그 시기를 놓친 게 두고두고 뼈아프다”고 말했다.

실제로 파운드리 시장은 2015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TSMC 매출도 2015년 34조4000억원에서 2016년 38조7000억원, 2018년 42조원, 2021년 64조7000억원으로 매년 급등했다. 삼성은 2017년 당시 파운드리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파운드리 사업을 별도 사업부로 분리했다. 하지만 이때 밝힌 연간 투자 금액은 10억 달러(1조2000억원). 이후 2020년까지 추가로 투입하겠다는 금액도 15억 달러에 불과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그 정도로는 한마디로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면서 “투자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지금부터 매년 수십조원을 투자해도 TSMC를 따라잡기 힘들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