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공급망 실사 지침, 지속가능성 공시 지침을 포함한 EU(유럽연합)발 환경 규제가 올해부터 잇따라 시행에 들어가면서 국내 산업계에 경고등이 켜졌다.
6일 현지 업계에 따르면 EU가 올해 도입을 추진하는 신규 규제만 43개에 이른다. 명분은 기후 위기 대응이지만, 속내는 역내 산업 보호라는 진단이 나온다. 지난 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난 EU 관계자들도 공정 경쟁과 환경보호를 내세웠지만, EU의 이익 추구라는 해당 조치의 배경도 숨기지 않았다. 미리엄 가르시아 페러 EU 무역담당 대변인은 “가장 중요한 건 EU의 이해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CBAM, 국내 철강업체 타격 우려 커
EU의 여러 규제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은 탄소국경조정제도다. 철강·알루미늄·시멘트 등을 수입하는 현지 업체는 10월부턴 제품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보고해야 하고, 2026년부터는 EU 기준을 넘어서는 배출량에 대해선 배출권을 사야 한다. 지난해 12월 EU 의회와 이사회, 집행위가 최종 법안에 합의하면서 올 10월부터 시범 시행에 들어간다. 유럽 분석기관들은 CBAM 시행에 따라 EU로의 수입이 1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할 만큼 파급력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대(對)EU 수출 비율이 전체 수출의 13%(44억달러·약 5조7000억원)를 차지하는 국내 철강 업계는 CBAM 시행으로 비상이 걸렸다. 현재 EU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t당 100유로(약 13만8000원) 수준으로, 1만3000원 안팎인 국내 탄소배출권의 10배 수준이다. 탄소국경조정제도에 따라 EU 탄소배출권을 살 경우 비용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북미에 버금가는 주요 수출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정정민 포스코 브뤼셀 사무소장은 “제도 도입 초기인 2026년에는 국내 철강 업계 피해가 수백억원 수준이겠지만 매출 감소는 해마다 늘어 수천억에 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현지 수입업자가 제조업체의 탄소배출량을 EU 당국에 보고하게 돼 있어 업체들의 제조 공정상 비밀이 공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플라스틱세도 기업들의 부담을 키우는 환경규제로 꼽힌다. 재활용이 불가능한 플라스틱 제품에 kg당 일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로, 지난해 영국에 이어 올 들어 스페인도 시행에 들어갔다. 특정 제품을 제조한 기업뿐 아니라 해당 제품의 소재·부품 조달을 포함한 공급망 전체를 대상으로 환경 훼손, 인권 침해 등을 확인해 보고하고 개선하도록 하는 공급망 실사 지침도 올 하반기 시행할 예정이다. 기존 비재무정보 공시지침(NFRD)에서 환경 부문을 강화해 개정한 지속가능성 공시 지침(CSRD)은 1월부터 발효됐다. 제품의 내구성과 재사용 가능성, 수리 가능성 등을 따지는 에코디자인, 새 배터리를 생산할 때 폐배터리에서 얻은 재활용 원료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신배터리 규정 등도 줄줄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국내 기업들 대응 속도
EU가 잇따라 규제를 강화하자 국내 기업들도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에 나서고 있다. 2003년 문을 닫았던 브뤼셀 사무소를 2019년 다시 연 포스코는 지난해 8월 마케팅·통상·환경·현지법인으로 구성한 TF(태스크포스)를 만들고 현지 규제 기관과 교류를 강화하고 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LG화학 유럽법인도 최근 플라스틱세를 비롯한 규제 관련 이슈를 전담할 현지 대관 조직 신설에 착수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EU 이사회와 집행위, 의회 등과 광범위한 협의가 필수적”이라며 “이를 위해선 개별 기업 차원의 대응을 넘어 정부와 업계 차원의 광범위한 협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만기 무역협회 부회장은 “EU의 새로운 규제가 한국 기업에 의도치 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며 “EU의 입법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철강·알루미늄·시멘트처럼 제조 과정에서 탄소 배출이 많은 품목을 수입할 때 이 품목들이 배출한 탄소량에 따른 비용을 부담시키는 제도. 탄소 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는 EU가 역내에서 생산한 제품과 수입 제품의 형평성을 맞춘다는 명분으로 도입한 것으로, EU 내에서 생산할 때보다 많은 탄소를 배출한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해 비용을 부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