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것은 펴고, 끊어진 것은 잇는다.”(1953년 최종건 SK 창업 회장, 선경직물 재건 시)

“우리는 회사가 아니라 미래를 샀다.”(1994년 최종현 SK 선대 회장, 한국이동통신 인수 후)

SK그룹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최종건 창업 회장과 동생 최종현 선대 회장의 어록집 ‘패기로 묻고 지성으로 답하다’를 6일 발간했다. 288쪽에 250개의 어록과 일화가 담긴 이 책엔 1950~1990년대 한국전쟁·석유파동·외환 위기 같은 격동의 시대에 맨손으로 사업을 일군 두 형제 기업인의 경영 철학과 신념이 담겨있다.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도, 불확실성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내려야 하는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故) 최종건(왼쪽) SK 창업 회장이 1969년 선경합섬을 찾아 폴리에스터 원사 공정을 살펴보고 있다. /SK그룹
고(故) 최종건(왼쪽) SK 창업 회장이 1969년 선경합섬을 찾아 폴리에스터 원사 공정을 살펴보고 있다. /SK그룹
폐암 수술을 받은 고(故) 최종현(가운데) SK 선대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최 회장 왼쪽은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오른쪽은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 /SK그룹

◇ SK, 최종건 창업 회장·최종현 선대 회장 형제 어록 출간

고(故) 최종건 SK그룹 창업 회장은 1953년 자신이 일했던 선경직물 공장이 전쟁 후 폐허가 된 것을 보고 27세의 나이로 선경직물 재건을 결심, 잿더미 속 부품을 주워다 직기를 재조립해 회사를 새로 일으켰다. “마음의 씨앗을 뿌리면 언젠가는 큰 나무가 된다” “공장을 재건하면 마을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는 5년 만에 직기 1000대를 갖춘 공장으로 키웠고, 1962년 ‘Made in Korea’가 새겨진 인견 직물을 국내 최초로 수출했다. “기회가 왔을 때 칼처럼 결단을 내리고, 화살처럼 추진한다”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던 결과였다. 그는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우리 국민들은 왜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사업보국(事業報國)을 몸소 실천했다. “저 공장은 내 개인 것이 아니라 국민 것”이라면서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는 마음으로 일하라”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또 “돈으로는 사람을 살 수 없다. 마음을 주고 사야 한다” “사업은 제품이 아니라 열정을 파는 것”이란 말을 자주 했다.

◇ “사업은 제품이 아니라 열정을 파는 것” “우리는 미래를 샀다”

그는 1969년 원사 공장을 완공해 섬유 사업 수직 계열화의 첫 단추를 끼웠다. “성공하는 리더는 꿈의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철학이었다. 그의 마지막 꿈은 화학섬유 원자재인 정유 공장을 짓는 것. 1973년 일본 이토추·데이진과 합작한 선경석유를 추진했지만, 1차 석유파동으로 연기되다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47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

형의 뒤를 이어 회사를 맡은 동생 최종현 회장은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를 평생 신념으로 삼았다. 1962년 미국 위스콘신대·시카고대에서 생화학·경제학을 배우고 귀국한 최 회장은 자금난을 겪는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그는 곧바로 ‘선경 5개년 계획’을 마련, 적자였던 선경직물을 1971년 흑자로 전환시켰다. 1973년 형의 뒤를 이어 회장에 취임했을 때 선경그룹은 선경직물·선경합섬부터 그해 인수한 워커힐호텔까지 계열사 9곳으로 구성된 미니 그룹이었다.

그는 “경영의 성패는 기획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회장 직속으로 경영기획실을 만들고 사업 확대에 나섰다. 1975년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를 선포한 데 이어 1980년 삼성그룹을 꺾고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했다. 1991년엔 당시 세계 3위 규모 정유 공장인 울산콤플렉스까지 완공했다.

그는 1992년 신년사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철학으로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4000억원에 인수해 SK그룹을 당시 재계 5위까지 키웠다. 당시 너무 비싸게 샀다는 지적이 나오자 그는 “우리는 회사가 아닌 미래를 샀다”고 일축했다.

최 회장은 노사 갈등이 심했던 시절에도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라면서 사람을 중시했다. 국내 최초의 기업 연수원(선경연수원)을 만들었고 “유(You)가 알아서 해”라며 위임 경영을 실천했다.

1973년부터 50년째 이어지고 있는 SK의 장학퀴즈 후원도 “나무를 키우듯 인재를 키운다” “사람을 믿고 기르는 것이 기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최 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는 1972년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세워 남산의 40배 면적에 나무 400만그루도 심었다. “기업은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그의 말은 SK의 사회 공헌 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