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그룹은 트럼프가 당선된 지 일주일여 만인 지난해 11월 13일 ‘공화당 텃밭’으로 통하는 미국 중서부 사우스다코타주에서 7000억원을 투자, 북미 최대 아시안푸드 공장을 짓는 착공식을 가졌다. 착공식 하루 전날 크리스티 노엄 사우스다코타 주지사는 트럼프 당선인으로부터 차기 정부의 핵심 요직인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재계에서는 “CJ가 트럼프 2기 정부와 ‘기막힌’ 인맥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착공식에 직접 참석한 노엄 주지사는 “이번 CJ의 투자는 사우스다코타주의 게임 체인저(업계의 판도를 바꿀 사건)”라며 “우리와 한국 간 파트너십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전 세계 기업들이 ‘선물 보따리’를 들고 미국으로 달려가고 있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전 세계 기업들에 미국 내 생산 기지를 지으라고 압박하는 동시에 이를 따르지 않으면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 트럼프 정부의 기조에 발맞추기 위한 것이다. 이미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 진영과 각을 세워왔던 빅테크들이 당선인의 정치적 성향에 맞춰 ‘다양성 정책’을 폐기하는 등 납작 엎드리는 모양새다.
현대제철의 미국 첫 제철소, SPC의 미국 첫 제빵 공장, LS전선의 미국 최대 규모 해저케이블 공장 등 한국 기업들도 가전부터 자동차, 배터리, 제철, 식품에 이르기까지 업종 불문하고 많은 기업이 미국에 첫 생산 거점을 짓거나, 기존 공장의 생산 품목·물량을 확대하는 등 투자 계획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미국 사업도, 네트워크도 확장
최근 ‘최초’, ‘최대’가 붙은 대미(對美) 투자 계획을 잇따라 내놓는 국내 기업들은 ‘성장하는 미국 시장 선점을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하지만, 트럼프 2기의 정책 변화에 대응하고 새 행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맺겠다는 것 역시 핵심적인 이유다. 트럼프 당선인은 후보 시절부터 모든 수입품을 대상으로 한 10~20%의 보편 관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중단 등을 밝혀왔다.
SPC그룹은 지난 2일 1억6000만달러(약 2350억원)를 투자해 미국 텍사스주에 첫 제빵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내놨고, 수일 뒤에는 허영인 회장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한다고 밝혔다. 현재 북미 지역에 200여 매장을 운영 중인데, 2030년까지 이를 1000개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핵심 시기가 될 ‘트럼프 2기’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현대제철도 수조 원을 투자해 미국에 첫 제철소를 짓기로 하고 미 루이지애나주를 유력한 후보지로 검토 중이다. 미국 내 상징적인 철강 기업인 ‘US스틸’의 부진으로 고민에 빠진 트럼프 당선인에게 안정적으로 쇳물을 생산하는 ‘투자 선물’을 안겨주는 동시에, 미국에서 자동차 생산을 늘리려는 현대차와 시너지도 내겠다는 뜻이다. LS전선도 약 1조원을 투자해 오는 4월 미 동부 버지니아주에 미 최대 규모의 해저케이블 공장을 착공할 계획이다.
◇불가피한 선택, 불확실성도 존재
이미 미국에 생산 기지를 둔 기업들도 생산 품목과 물량 확대를 검토 중이다. 트럼프 1기였던 지난 2018년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으로 세탁기에 최대 50%의 고율 관세를 부과받은 가전 업계가 대표적이다. LG전자는 현재 미 테네시주 세탁기 공장의 생산 품목을 냉장고·TV 등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조주완 LG전자 사장은 지난 8일 미국 현지 간담회에서 “생산지 조정, 같은 모델을 여러 군데에서 만드는 스윙 생산 등 여우에게 쫓길 때마다 열어보는 복주머니 같은 ‘플레이북’을 가지고 시나리오별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미국 시장 확대를 노리는 현대차도 미국 조지아주의 전기차 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하이브리드차도 생산해 연간 생산 규모를 기존 30만대에서 50만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 속에서 활로를 찾고있는 배터리 업계도 미국 생산 확대를 꾀하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12일 “현지 합작법인, 단독 공장 등 미국 내 추가 공장 설립을 위한 다양한 방향을 현재 검토 중”이라고 했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우려도 여전하다. 기본적으로 건설비·인건비 등이 비싼 데다, 환율 폭등 여파까지 겹쳤고, 이를 보전할 미 정부 보조금마저 중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은 저출산에다 내수 침체 장기화, 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투자 환경이 상존하는데 트럼프 2기 출범까지 겹치다 보니 미국 투자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