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은 21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중국이 펜타닐(중국산 원료로 만들어지는 마약)을 멕시코와 캐나다에 보낸다는 사실에 근거해 1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며 부과 시점과 관련해선 “아마도 2월 1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EU에 대해서도 “EU는 너무, 너무 나쁘다(very, very bad)”며 “그들은 관세를 물게 될 것. 그것이 (무역) 공정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날 취임식 후 “멕시코와 캐나다가 이민자들을 대규모로 보내고 있다”며 “관세 25%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중국과 EU를 향해 관세 전쟁을 예고한 것이다. 무역적자를 용납하지 않고, 관세 장벽을 쌓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역·통상 정책을 두고 자유무역의 근간인 200년 된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부정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된다. 저마다 적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면 무역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요 교역국 차례로 겨냥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과 이튿날 차례로 관세 부과를 예고한 멕시코와 캐나다, 중국과 EU는 미국의 주요 적자국으로 꼽힌다. 2023년 기준 중국은 2794억달러(약 402조원)로 미국의 최대 적자국을 기록했고, 멕시코(2위), 캐나다(6위)도 상위권에 올랐다. EU 회원국 27곳 중에선 830억달러를 벌어간 독일(4위)을 비롯해 아일랜드(7위), 이탈리아(10위) 등 세 나라가 10위 안에 들었다. 이들 세 나라에서 미국이 입은 적자액만 합쳐도 1923억달러에 이른다.
균형무역을 무역·통상 정책의 중심축으로 잡은 트럼프 2기 정부가 무역적자가 많이 발생하는 국가를 관세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사업가로 살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적자=손실’이라고 인식하다 보니 균형무역을 강조하고, 이 같은 배경 아래 전날 서명한 ‘미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 행정명령에서 기존 무역협정 재검토, 무역적자 원인 조사, 불공정 무역 관행 검토 등을 지시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특정 국가와 무역적자가 지속되는 원인을 공정하지 않은 무역 관행에 있다고 보고 이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결국 균형무역과 공정무역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관세 부과 대상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여론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마약과 불법 이민 문제를 내세웠지만, 그 바닥에는 중국과 멕시코, 캐나다를 상대로 한 무역 불균형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트럼프는 각국이 보조금 등 불공정 무역을 하는 탓에 미국에 적자가 쌓이고 있다고 인식한다”며 “보호무역으로 국부를 지키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고용? 최후통첩?
트럼프 1기 당시 200억달러 안팎에 그쳤던 미국의 대(對)한국 무역 적자 규모가 500억달러 이상으로 불어난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대한 압박도 예상된다. 이미 멕시코와 캐나다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직접적인 피해가 우려된다. 대기업 관계자는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가 부과되면 사실상 이 지역 공장에서 미국으로 수출길은 막히게 된다”며 “이미 국내 업체 공장 중에 가동을 중단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다만 불과 일주일 정도 뒤인 다음 달 1일부터 관세 부과가 가능할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액시오스는 “일반적으로 관세 부과는 준비에 몇 달 정도가 걸린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방식으로 관세를 부과할지에 대해 아직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25일 “내년 1월 20일 내 첫 행정 명령 중 하나로 서명하겠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취임 이후 구두(口頭)로만 관세를 예고했다. 대규모 무역적자국을 향해 협상용으로 경고성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래의 달인’이라 불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게임의 규칙을 바꿔 관세를 먼저 부과한 뒤 추가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마약을 내세워 비상사태를 선언하면 관세를 비롯해 수출입 등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며 “관세 부과 시사 발언은 각국에 빠른 대응을 촉구하는 강력한 압박”이라고 말했다.
관세 부과에 따른 물가 상승 우려는 변수다. 수입업자가 관세를 붙여 가격을 매겨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에너지 가격을 낮춰 인플레이션을 잡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관세 영향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관측도 있다”고 전했다.
☞비교우위론
어떤 나라가 상대국보다 기회비용이 덜 드는 활동에 집중해야 서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이론. 각국이 보호무역보다 자유무역을 해야 더 효율적이고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이론으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1817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