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증시에서 재계 주요 그룹 시가총액 순위가 급변하고 있다. 본지가 한국거래소를 통해 2023년 말부터 최근까지 약 1년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포함된 주요 기업들의 시가총액 변화를 분석한 결과, LG그룹이 SK그룹에 2위를 내주고, HD현대와 한화그룹이 5·6위로 가파르게 순위가 오르는 등 변화가 컸다. 포스코그룹과 카카오·네이버 등 기존 주요 산업 대표 기업들도 순위가 하락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AI(인공지능)와 조선·방산 등이 부상하는 동시에, 트럼프 정부 출범과 중국의 저가 공세 등으로 철강·2차전지 등이 위축되는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자본시장에서도 투자자들의 움직임이 빨라진 여파다.
물론 주가가 단기적인 실적과 전망에 좌우되기도 하는 만큼 시가총액 자체를 그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가와 시가총액에는 투자자들이 대내외 변수에 기업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미래 산업에 대해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반영돼 있다. 그런 만큼 재계의 시가총액 순위가 빠르게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산업 역시 급박하게 재편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분석이 나온다.
◇AI·조선·방산에 상위권 요동
지난 5일 기준 재계 시총 순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HD현대그룹과 한화그룹이다. 2023년 말 8위였던 HD현대그룹은 약 1년 새 시총이 2.3배로 늘어나며 5위에 올랐다. 한화 역시 시총이 23조1000억원 증가하며 이 기간 10위에서 6위로 뛰어 포스코·카카오·네이버를 제쳤다. 두 곳의 공통점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수주 소식이 잇따르고 있는 조선·방산이 주력이라는 점이다. K조선 ‘빅3’ 중 2곳인 HD한국조선해양과 한화오션이 각 그룹의 핵심 계열사다.
또 한화그룹의 주력 방산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작년 3분기 기준 수주 잔고가 29조9000억원에 달하며 주가가 2023년 말 대비 3배 이상이 됐다. 전력 인프라 기업인 HD현대일렉트릭은 AI 바람 속 전력 수요가 많은 데이터센터 건설이 이어지며 작년 코스피 시장 주가 상승률(377%) 1위를 하기도 했다.
이 같은 AI 바람은 상위권 다른 그룹에도 영향을 크게 끼쳤다. SK그룹은 AI 연산의 핵심 반도체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분야 선두인 SK하이닉스(현재 시총 약 149조원)를 앞세워 LG그룹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삼성그룹은 시총 1위를 지켰지만 AI 충격이 작지 않다. HBM 분야에서 부진한 여파로 삼성전자의 주가가 크게 하락한 탓에, 그룹 시가총액이 2023년 말 대비 142조2000억원 줄었다.
또 카카오·네이버도 국내 대표 IT 기업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글로벌 빅테크와 비교해 AI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지적 속에 시가총액이 줄며, 3단계씩 순위가 하락해 9·10위에 그쳤다.
◇철강·유통·석유화학 부진 뚜렷
철강·유통·석유화학 산업이 주력인 기업들은 중국과의 경쟁 여파로 순위가 떨어졌다. 포스코그룹의 경우 시가총액이 2023년 말 93조9000억원에서 지난 5일 41조1000억원으로 절반이 됐다. 순위도 이 기간 5위에서 7위로 떨어졌다. 중국산 저가 철강 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감산(減産)과 공장 가동 중지 등이 이어지고 있는 여파다. 신사업으로 삼은 2차 전지 소재 분야 계열사 역시 중국과의 경쟁과 글로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영향이 크다. LG도 SK에 2위를 내준 것이 주력 계열사인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이 석유화학 부진과 배터리 침체를 겪는 여파다.
2023년 말 시총 순위 12위·13위였던 롯데그룹과 CJ그룹도 순위가 지난 5일 기준 18위·19위로 1년 새 크게 떨어졌다. 두 곳 모두 고물가와 내수 침체 여파에다 온라인 쇼핑 시장 성장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탓이란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롯데의 경우는 석유화학 계열사 롯데케미칼도 부진하다.
재계 관계자는 “AI를 중심으로 한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데다 트럼프 정부 출범과 국내 정치 상황까지 겹치며 정치·외교적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어 상황에 따라 앞으로 시가총액 순위가 더 큰 폭으로 변할 수 있다”며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을 갖추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