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조선·가전 등의 핵심 원료이자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을 둘러싼 트럼프발(發) 무역 전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9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해외 철강 수입으로 US스틸을 비롯한 자국 철강 산업이 위기에 빠지며 핵심 지지층인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산업용뿐 아니라 군사용으로도 핵심인 철강 산업을 안보 차원에서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6위 철강 생산국이자, 대미(對美) 4위 철강 수출국인 한국 철강 업계의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현재 한국을 비롯한 세계 철강 업계는 건설, 자동차 등 전방 산업의 부진에다,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범람으로 심각한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 이 와중에 철강 핵심 시장인 미국이 25% 관세라는 높은 장벽까지 쌓은 것이다. 이날 포스코홀딩스,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국내 주요 철강 기업 주가는 일제히 하락세를 보였다. 1기 때처럼 막판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제철소를 지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졌다.
◇쿼터 줄이거나, 추가 관세 가능성
미국은 철강 자체 생산보다 수요가 많은 ‘철강 순수입국’이다. 자체 생산량이 총소비량의 90% 수준(2023년 기준)이다. 지난해 수입량은 약 2886만t으로 캐나다(22.7%), 브라질(15.6%), 멕시코(12.2%) 등 인접국에서 절반가량을 들여온다. 한국(9.7%)은 그 뒤를 잇는 4위다.
트럼프 대통령이 ‘25% 관세’를 어떻게 부과할 것인지는 아직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와 철강 업계에서는 현재 무관세인 국가에는 25% 관세를 매기고, 25% 적용 국가에는 50%를 부과하는 식의 ‘추가 관세’가 적용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2018년 이미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 25% 관세’ 조치를 내렸을 때, 정부 협상을 통해 당시 수출 물량의 30%를 삭감한 쿼터(연 263만t) 안에서만 무관세를 적용받고 그 이상은 수출을 못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번 조치에서 통상 전문가들은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는 현재의 263만t 쿼터에 25% 관세를 추가로 매기고, 그 이상은 현재처럼 수출을 막는 것이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쿼터제는 쿼터제대로 적용받고, 거기에 관세까지 받게 될 경우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25% 관세를 적용받는 대신 기존의 쿼터제를 없애는 것이다. 셋째는 현재 부여된 쿼터를 추가로 축소하는 것이다. 허정 서강대 교수는 “1기 때 부여받은 쿼터를 추가로 줄이면서 무관세를 유지하는 식으로 협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측은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대로,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업계와 긴밀히 공조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로 현재 50만t 수준인 중국의 대미 철강 수출 물량이 ‘관세 장벽’에 막히면, 이 물량이 한국을 비롯한 인접국으로 흘러 들어가 미국 외 시장의 피해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미국 생산 기지 논의도 빨라질 듯
국내 철강 업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철강 관세’ 카드를 언급해 온 만큼, 미국 내 생산 기지 확보 등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을 마련해 둔 상태다. 현대제철은 수조 원을 투자해 미국에 첫 제철소를 짓고, 조지아주에 있는 현대차·기아 공장에 자동차용 강판을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재 미 루이지애나주를 유력한 후보지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포스코도 미국에 고로 혹은 전기로를 지어 쇳물을 직접 생산하는 상(上)공정 거점 확보를 검토 중이다.
다만 현지에 제철소를 짓는 것은 건설비·인건비 등이 비싼 데다, 환율 폭등 여파까지 겹쳐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특히 고로나 전기로는 전문 정비 인력이 상주해야 하는데 현지에선 전문가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도 애로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