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 군함 건조를 한국 등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하는 ‘해군준비태세 보장법’ 등 법안 2건이 마이크 리, 존 커티스 미 공화당 상원 의원 주도로 지난 5일 발의된 것으로 12일 확인됐다.
미국은 1920년 연안 항구를 오가는 민간 선박은 자국 내에서만 건조하도록 한 존스법을, 1965년과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군함을 자국 조선소에서만 건조하게 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을 각각 도입해 자국 조선 산업을 보호해왔다. 그런데 최근 자국 조선업 약화로 중국에 전투함 숫자가 역전되는 등 해양 패권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자, 급한 대로 군함 건조부터 동맹국에 맡길 수 있게 규제를 풀기로 한 것이다. 이 법안은 상·하원 다수를 차지하는 공화당에서 발의돼 의회 통과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함정을 만들 역량이 있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 정도밖에 없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작년 11월 당선 직후 윤석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고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당시 미국 매체들조차 “K조선에 미국이 사실상 SOS(구조 요청)를 했다”고 해석했다.
◇해양 패권 위기감… 韓·日 조선업에 SOS
이번에 발의된 법안 문구에는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국가 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에 미 해군 함정 건조를 맡길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세부 조건으로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비용이 미 조선소보다 낮아야 하고, 미국 군함을 제조할 외국 조선사는 중국 소유이거나 중국 투자를 받아선 안 된다는 규정도 명시해 놓고 있다. 현재 글로벌 선박 수주 시장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점유율은 90% 수준이다. 따라서 이번 법안에 규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선박 제조 국가는 사실상 한국, 일본뿐이다. 특히 한국이 수혜를 더 볼 것이란 전망이 많다. 미국은 당장 배를 만들어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데, 현재 신속하게 함정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역량은 한국이 일본을 크게 앞선다.
예를 들어 HD현대중공업이 건조해 작년 12월 취역한 정조대왕함은 미국이 운영 중인 이지스 구축함과 비슷한 사양을 갖췄다. 그러나 건조 비용은 절반, 건조 기간은 3분의 1로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일본 조선업은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글로벌 점유율은 4%대까지 줄어든 상태다.
우리 조선업의 이런 경쟁력이 트럼프 정부의 무차별적인 고(高)관세 통상 압박 속에서 향후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조선 분야의 적극적인 협력을 대가로 자동차, 반도체, 철강 등 다른 주요 산업에 대한 압박 강도를 낮출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30년간 1500조원 美 군함 시장 파급 효과… 韓 최대 호재
미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미 해군은 함정 규모를 작년 295척에서 2054년까지 390척으로 늘릴 계획이다. 노후함은 퇴역시키고 신규 군함 364척을 투입한다. 이런 비용으로 총 1조750억달러(약 1560조원)를 지출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조선 업계에서는 이 중 상당수가 동맹국에 발주되면 “전례 없는 새 시장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국내 조선 업계는 트럼프 당선 이전부터 미국 시장 확장을 미리 준비해왔다. 한화오션은 작년 8월 국내 조선사 중 처음으로 미국 해군의 MRO(유지·보수·정비) 사업을 수주했고, 지난 연말 미국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 인수도 완료했다. HD현대중공업도 현재 1조원 규모 함정 사업을 2030년까지 3배로 늘릴 계획이다. 이런 기대감에 이날 주가도 크게 올랐다. HD현대중공업이 전일 대비 15.36% 급등했고, 한화오션(15.17%), 삼성중공업(5.98%)도 모두 올랐다.
☞존스법과 번스-톨레프슨 수정법
미국의 자국 조선업을 육성,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었으나 일감 몰아주기 등 부작용으로 미국 조선업 붕괴 원인으로 꼽힌다. 존스법(Jones Act)은 미국 연안 항구 사이를 오가는 선박은 미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법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 안보 강화 차원에서 제정돼 현재까지 시행 중이다. 번스-톨레프슨 수정법(The Byrnes-Tollefson Amendment)은 미군을 위한 모든 선박과 그 주요 부품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 법으로 1965년, 1968년 두 차례에 걸쳐 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