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美 앨라배마 공장

현대차그룹이 24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향후 4년간 210억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자동차 생산 시설에 86억달러, 제철소와 부품·물류에 61억달러, 미래 먹거리와 에너지 부문에는 63억달러를 각각 집행한다.

제철소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것부터, 첨단 자동차를 만드는 데까지 필요한 전(全) 생산 단계를 미국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가 1986년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투자”라며 “특히 현대제철은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내 13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했다.

이번 투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주력 산업인 자동차에 고관세를 예고하자, 최대 시장 미국을 놓칠 수 없는 현대차가 선제적으로 내놓은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현대차의 미국 대규모 투자는 향후 한미 관세협상에서 한국 측에 유리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현대차의 이번 투자가 자동차, 철강에 이어 반도체, 배터리, 가전 등 한국 핵심 산업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연속선상에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안에서는 한국 사회의 반기업적인 문화와 규제가 점차 심각해지는 가운데, 밖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까지 덮치면서 해외 진출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첨단 제조 기업의 공장뿐 아니라 인력, 기술 노하우까지 한국을 떠나는 ‘K제조업’의 공동화(空洞化)에 대한 걱정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번 현대차의 대규모 미국 투자가 웃을 수만은 없는 투자인 까닭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등 해외에선 인센티브와 관세 압박이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들며 한국 기업들을 잡으려고 난리인데, 정작 국내에선 ‘규제를 제발 풀어 달라’는 기업들의 호소조차 먹히지 않는 답답한 형국”이라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안에선 규제, 밖은 트럼프 압박… K제조업, 美에 150조원 투자한다

현대차그룹이 선제적으로 210억달러의 대미(對美) 투자를 발표하면서 삼성과 SK, LG, 포스코, 한화 등 다른 주요 그룹 역시 순차적으로 미국 투자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커지고 있다. 투자 발표에 동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차를 “정말로 위대한 회사”라고 치켜세우며, 정의선 회장과 장재훈 부회장 등 현대차 경영진의 이름을 직접 호명했다.

이에 앞선 21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도 미국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항공이 보잉, GE에어로스페이스의 제품과 서비스 327억달러(약 48조원)어치를 구매한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미국의 ‘관세 정책’을 총괄하는 러트닉 장관이 해외 기업의 자국 상품 구매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와 대한항공이 수십조 원짜리 계약을 체결한 것은 사업적 이유도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선물을 건넨다는 측면도 있다”며 “다른 기업들도 정권 초기 우호적인 사업 환경을 만들기 위한 투자 계획을 고민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K제조업의 ‘탈한국’

이미 현대차그룹은 IMF 외환 위기 이후 해외를 중심으로 생산 기지를 확대해 왔다. 현대차는 1996년 아산공장, 기아는 1997년 문을 연 화성3공장 이후 지난해까지 생산 시설을 국내에 짓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생산 규모도 줄었다. 2010년대 초반에는 현대차, 기아 합쳐서 생산능력이 연산 350만대에 달했지만 주 52시간제 시행 등과 맞물리면서 현재는 생산이 315만대다.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도 점차 한국을 떠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 2곳과 연구개발(R&D) 시설 1곳 등을 짓는 데 370억 달러(약 54조원) 이상을 투자하기로 했다. SK 역시 인디애나주에 인공지능(AI) 연산의 핵심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의 패키징 공장과 조지아주의 배터리 공장 등을 포함해 220억달러를 투자한다.

LG는 테네시주에 가전 공장과 조지아주에 배터리 공장을 짓는 데 200억달러를, 한화는 태양광 모듈 공장을 짓고 필리 조선소를 인수하는 데 22억달러를 투입했다. 현대차를 비롯해 이 같은 주요 기업의 투자만 합해도 1022억달러(약 150조원)에 달한다.

이 같은 현지 투자는 액수도 클 뿐 아니라, 단순히 한 기업만의 이동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로 현대차가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공장을 지으면서 부품 계열사인 현대모비스와 브레이크·콘솔·도어 등을 생산하는 중소, 중견 협력사들도 일제히 미국으로 이동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 기업들도 함께 진출했고, 배터리 소재 업체들도 동참하고 있다. 즉 하나의 ‘가치 사슬’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각종 규제도 ‘K제조업’ 발목 잡아

현대차의 이번 투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장벽’이 가장 큰 배경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엔 한국 사회의 반기업적인 문화와 규제, 강성 노조 등 기업을 옥죄는 문화가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가 연구개발 분야에 한정해 주 52시간제 예외를 허용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이는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제조업 경영자들에게 공포로 불리는 ‘중대재해처벌법’ 역시 우리 기업들의 해외행은 물론 해외 기업들의 국내 진출까지 가로막는 대표적인 규제이지만 완화조차 쉽지 않다. 과도한 상속세 때문에 가업 승계가 어렵다는 기업들의 호소도 외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상공회의소가 ‘한국은 기업 경영자에게 과도하고, 불공정한 형사처벌을 남발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USTR(미 무역대표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미국 기업 경영자들이 근로기준법 위반, 세관 신고 오류 등으로 형사 기소, 출국금지, 징역형 등의 처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특정 기업이 법을 위반하면, 개인이 아닌 법인을 문제 삼고 관련 소송 또한 민사로 이뤄지는 것에 비해 과도한 처벌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