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인상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국이 유럽·아시아의 미 우방국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관계 강화에 나섰다. 2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영국·독일·프랑스 및 한국 등 세계 각국의 기업 수장 30여 명과 만나 “중국에 대한 신뢰가 곧 미래에 대한 신뢰”라며 중국과의 협력 확대를 제안했다. 무차별적으로 관세 인상을 강행하는 트럼프와 미국의 우방국 사이에 분열 조짐이 보이자 그 틈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나선 셈이다. ‘국제 공상(工商) 업계 대표 회견‘이란 이름의 이날 행사엔 지난 23~24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포럼(CDF)에 참석한 기업 수장 80여 명 가운데 일부가 초대됐다.
한국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시진핑과 회동했다. 이 회장이 시진핑과 만난 것은 2015년 중국 보아오포럼 기업인 간담회 이후 10년 만이다. 이날 만남은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이뤄졌고 회동 외에 시 주석과 별도의 개별 면담은 없었다고 전해졌다. 이번 회동에 참석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양대 시장인 중국과 미국의 강한 투자 압박 속에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진핑과 이날 면담한 기업인 가운데 절반가량이 유럽 기업 수장이었다. 중국 국영 CCTV의 시사 프로그램 ‘대국외교최전선‘에 따르면, 참석자 가운데 15명이 유럽 기업 수장으로 미국(4명)과 아시아(5명) 기업 경영인을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BMW·벤츠·이케아 불러… 시진핑 “中은 유망 투자처”
시진핑은 지난해 CDF 폐막 이후 미국 기업인들만 따로 만나 대화했는데, 트럼프가 백악관에 재입성해 세계 각국과 무역 분쟁을 일으키자 올해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국·사우디아라비아 등 다양한 국가 기업인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시진핑과 만난 유럽 기업인은 독일의 올리버 집세 BMW 회장과 올라 셸레니우스 메르세데스 벤츠 회장,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의 폴 허드슨 CEO(최고경영자)와 영국 HSBC의 조르주 엘헤데리 CEO 등이었다. 덴마크 해운 기업 머스크, 스웨덴 가구 회사 이케아 등의 수장도 참석했다. 다른 지역에선 한국의 이재용 회장과 곽노정 사장을 비롯해 사우디 국영 석유 기업 아람코 등의 경영인이 시진핑과 만났다. 중국이 유럽과 한국 등을 상대로 ‘우군 만들기‘에 나선 한 장면이다.
중국의 ‘경제 실세‘인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 외교 사령탑 왕이 외교부장도 유럽 지도층을 만나 미국의 일방적 보호주의를 함께 저지하자며 대미 전선 확대를 시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허리펑은 지난 27일 오후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마로시 셰프초비치 유럽연합(EU) 통상 담당 집행위원과 만나 “일방주의와 보호주의를 함께 막아내고 다자 무역 체제를 지켜내자”며 “중국과 EU가 대화와 교류를 강화하고 상호 개방을 확대해 건강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촉진하자”고 강조했다. 같은 날 왕이는 장 노엘 바로 프랑스 외무 장관과 회담했다. 그는 회담에서 “변화와 혼란이 얽힌 국제 정세에 직면한 가운데 양측(중국·프랑스)은 일방주의와 진영 대립, 단절을 반대하고 다자주의와 대화·협력, 상호 이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세계가 결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이는 앞서 파울루 랑젤 포르투갈 외교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도 “중국은 유럽을 다극 세계의 중요한 축으로 간주한다”고 강조했다.
시진핑은 이날 회담에서 세계 주요 기업의 수장들에게 미국과의 무역 갈등에 대해 언급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그는 미국을 암시하며 “다른 사람의 길을 막는 것은 결국 자신의 길만 막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빛을 꺼뜨린다고 자신의 빛이 밝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중국은 이전에도 그렇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외국 기업인들에게 이상적이고 안전하며 유망한 투자처”라고 했다.
미국은 다음 달 2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를 올리는 ‘상호 관세’ 부과를 예고한 상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당국자들을 인용해 “미국이 EU 국가에 일괄적으로 관세 20%를 부과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미국 교역국 중 무역 적자 8위에 올라 있는 한국도 추가 관세를 피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유럽은 미국과 각을 세우면서 이미 중국을 향한 비판 수위를 낮추며 실리적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EU는 과거 중국을 ‘경제적 경쟁자, 체제적 라이벌‘로 규정하며 중국 인권 문제와 지정학적 위협에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으나, 최근 유럽 외교관들은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건 사치‘라며 티베트·신장·홍콩 문제 등에 대한 비판을 줄이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중국과 상호 이익이 되는 분야에서 협력하자”며 유화적인 발언을 내놓았다.
중국은 유럽 투자 유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미·중 관세 전쟁이 본격화된 가운데 중국 내부에선 부동산 장기 침체와 내수 부진 등의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의 중국 직접투자액(FDI)은 전년 대비 27% 감소하며 중국 경제에 부담이 커졌다.
이번 회동에 참석한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양대 시장인 중국과 미국의 강한 투자 압박 가운데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상황이다. 중국은 현재 삼성전자 매출의 31%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줄곧 미주 지역이 최대였다가, 지난해 중국이 약 65조원의 매출로 미주(약 61조원)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중국이 각각 전체 매출의 63%, 23%(지난해 기준)를 차지한다. 현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반도체 관세‘를 무기로 휘두르며, 자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직접 생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지난 24일 현대차그룹이 미 백악관에서 210억달러(약 31조원) 투자 계획을 밝힌 것이 트럼프 취임 후 사실상 첫 대규모 대미 투자였다. 삼성과 SK로선 미국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 시진핑 주석과 한자리에 앉아 투자 관련 회동을 하는 상황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두 그룹은 이번 회동과 관련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재용 회장도 28일 귀국하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중국 역시 두 기업에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자 핵심 생산 기지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생산의 40%를,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 생산의 각각 40%, 2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이날 회동에 앞선 지난 23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포럼(CDF)에도 이재용 회장과 곽노정 사장이 나란히 참석해 중국 고위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포럼 이후 이 회장은 베이징 샤오미 전기차 공장과 선전의 전기차 기업 BYD(비야디) 본사를 잇따라 찾는 등 중국 전장(차량용 전기 장비) 사업 확대를 위해 직접 발로 뛰는 행보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