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發) 관세 폭탄’이 현실화하면서 국제 유가가 4년 만에 1배럴당 6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원유뿐 아니다. 주요 산업용 원자재 가격도 일제히 타격을 입고 있다. 대표적인 게 구리다. IT·전기·건설 등 모든 산업 분야에 쓰여 ‘경기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데, 이달 들어서만 평균 가격이 9% 떨어졌다. 스마트폰과 전기차 배터리에 사용돼 ‘하얀 금’으로도 불리는 리튬도 이 기간 가격이 2% 하락했다. 미국발 관세 전쟁으로 각국의 물가가 오르고, 소비 수요가 위축되면서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원자재 가격에 반영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최근 각국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며 금융 시장이 흔들리고 소비 수요 위축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원자재 가격까지 폭락하면 경제 위기 수준의 충격이 닥칠 가능성이 크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40달러까지 폭락 우려”

8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59.58달러로, 직전 거래일보다 1.12달러(1.85%) 떨어졌다. WTI 가격이 60달러 아래로 내려간 것은 코로나 재유행과 미·중 갈등이 겹친 2021년 4월 12일(59.7달러) 이후 4년 만이다. 글로벌 원유 가격의 기준으로 불리는 브렌트유도 같은 기간 배럴당 62.82달러로 1.39달러(2.16%) 하락해, 60달러 선에 근접했다.

그래픽=박상훈
그래픽=박상훈

‘미국발 관세 폭탄’이 유가 하락을 주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전 세계 주요 국가를 상대로 상호 관세를 매길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후 4일 만에 WTI는 17%, 브렌트유는 16.2%나 하락한 것이다.

특히 경제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관세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 유가가 당분간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많다. 미국 관세에 반발해 중국이 보복 관세를 매기고, 미국이 또다시 관세를 높이는 형태로 갈등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최근 관세 부과 등으로 경기 침체가 더욱 깊어진다면 내년 말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40달러 아래로 폭락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월간 보고서에서 “세계 무역을 둘러싼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거시 경제 지표가 악화했다”며 “석유 수요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했다. 산유국들의 증산도 일부 영향을 주고 있다. 석유 수출국 협의체인 OPEC+(오펙 플러스)가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인한 시장 혼란을 우려해 생산량을 늘리고 있어서다. 다음 달부터 하루 41만1000배럴을 증산하겠다는 방침이다.

◇구리·니켈도 줄줄이 하락

문제는 경기 침체의 공포가 유가와 달리 ‘장기 침체’로 이어질 수 있는 글로벌 원자재 가격까지 강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용으로 주로 쓰는 구리·니켈·알루미늄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은 미국의 관세 조치 이후 계속 폭락하고 있다. 이달에만 구리와 리튬이 각각 9.4%, 2.2% 하락한 데 이어 스테인리스나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니켈도 9.2%, 선박 재료나 자동차 제조에 쓰는 알루미늄도 6.1% 하락했다. 강천구 인하대 초빙교수는 “구리와 니켈 가격이 움직이는 것은 경기가 얼어붙고 산업 전망이 불투명해졌다는 신호”라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또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 중 한 곳인 미국에서 친환경 정책이 후퇴하거나 속도가 느려질 수 있는 것도 가격 하락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내연차 중심의 기존 자동차 산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여파로 전기차 수요 등이 위축되는 상황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유와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세계 각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원유 수출로 전쟁 비용을 충당해 온 러시아는 ‘초비상’이다. 지난 7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국제 경제 폭풍이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락가락 트럼프 정책이 변수

러시아 연방은 전체 예산 3분의 1을 원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어 유가 하락이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도 지난 2월 파운드당 4.25달러로 높여 잡았던 올해 구리 평균 가격을 불과 두 달 만에 3.9~4달러로 다시 낮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따라 앞으로 유가는 변동성이 커질 수도 있다. 미국이 세계 각국과 상호 관세 시행 규모 등을 놓고 협상에 착수한 만큼 관세 적용 범위가 조정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관세 정책이 완화될 경우 유가가 다시 배럴당 70달러 안팎까지 회복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태환 에너지경제연구원 석유정책연구실장은 “원유와 원자재는 결국 산업 밸류체인의 최전선에 있는 만큼 경기 침체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관세 폭탄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