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이 공동으로 미국에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앞서 현대차 계열사인 국내 2위 철강 기업 현대제철이 미 루이지애나주에 58억달러(약 8조2300억원)를 투자해 제철소를 짓겠다고 밝혔는데, 1위 업체인 포스코가 이례적으로 여기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포스코와 현대차그룹은 수십 년간 자동차 강판을 납품하는 거래 관계 속에서 적잖은 충돌이 있었고, 이후 현대제철이 설립되면서 국내 철강 1·2위 업체로서의 경쟁도 벌여온 복잡한 관계다. 하지만 갈수록 확대되는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전쟁’ 속에서, 라이벌 기업들이 손을 잡는 상황이 펼쳐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래픽=박상훈

◇‘파트너‘가 된 ‘경쟁자’

21일 서울 강남구 현대차 사옥에선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의 ‘철강·이차전지 분야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 협약’ 체결식이 열렸다. 양 사가 미국 제철소에 공동 투자하고, 전기차의 핵심인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도 손을 잡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인 투자액이나 지분율, 조건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양 사는 “투자 조건을 지속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앞서 현대차는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8조원가량을 ‘자기 자본 50%, 금융기관 차입 50%’ 비율로 충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중 자기 자본의 절반가량(약 2조원)은 현대차 그룹사들이 대고, 나머지는 외부 투자를 받기로 했는데 여기에 포스코가 ‘파트너‘로 참여한 것이다.

이로써 현대차는 투자금을 확보하고 리스크(risk·위험)를 분산하는 효과를 거두게 됐다. 현대차는 지난달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총 31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지만 제철소에만 8조원 이상이 드는 막대한 투자 비용과 불확실한 수익성은 부담이었다. 업계에선 “자체 생산한 철강을 미국 내 현대차 생산에 활용한다는 계획이지만, 예상보다 낮은 가동률이나 시장 상황의 변화로 투자 대비 기대 수익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포스코는 이번 투자로 ‘북미 시장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작년 취임한 장인화 회장은 북미 현지에서 쇳물을 뽑아 반(半)제품을 만드는 제철소를 짓겠다는 ‘현지 완결형 투자’ 계획을 수차례 밝혀 왔는데, 지금까지 뚜렷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현대제철의 미 제철소 지분 투자를 통해 이를 일정 부분 현실화하게 된 셈이다. 포스코홀딩스의 작년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은 6조7679억원으로 ‘실탄‘은 충분한 상태다. 양 사는 “포스코가 현지 제철소 생산 물량 일부를 넘겨받아 직접 판매하는 방안 등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을 국내에서 오랫동안 유일하게 생산해 왔던 포스코(구 포항제철)에, 자동차 강판이 절실했던 현대차는 오랜 기간 ‘을(乙)‘이었다. 이에서 벗어나려고 1970년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제2제철소’ 유치에 사활을 걸었지만, 포스코의 강력한 견제로 이를 뺏겨 지금의 ‘광양제철소‘가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로도 현대가 ‘제철 자립‘을 꾀할 때마다 포스코는 철강재 공급을 거절하고, 특허를 문제 삼아 취소시키는 등 꾸준히 신경전을 벌여 왔다.

◇경쟁사 프로젝트에 兆단위 투자는 이례적

재계에선 경쟁사의 프로젝트에 조(兆) 단위가 예상되는 거액을 들여 참여하는 것이 이례적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실제로 이번 투자의 주도권은 철저히 현대차가 쥐고 있다.

미국에 짓는 제철소도 현대제철이 포스코보다 긴 업력을 보유한 전기로(爐)다. 현대차 사옥에서 이뤄진 이번 협약에 포스코에선 지주사의 대표이사 사장이, 현대차에선 부사장급이 참석했다.

◇이차전지 소재도 협력

양 사는 제철소 투자와 함께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도 손을 잡겠다고 밝혔다. 전기차 핵심인 이차전지 소재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한 현대차와, 리튬부터 양·음극재 등 이차전지 소재 사업에 경쟁력을 보유한 포스코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그룹은 ‘공급망 구축과 차세대 소재 개발 분야에서 협업점을 찾아 나갈 것‘이라고 했다. 지분 투자 등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선 “아직 논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제휴에 대해 포스코 측은 지난해 장인화 회장 취임 이후 양 사가 꾸준한 논의를 이어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날 협약식에 참석한 포스코홀딩스 이주태 대표이사 사장은 “글로벌 통상 압박과 패러다임 변화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양 사가 시너지를 내기로 한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철강과 이차전지 소재 등 그룹 사업 전반에 걸쳐 지속 성장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