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초 부산 서대신동 락희화학공업사 공장.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지펴가며 원료를 부어 화장품 ‘럭키크림’을 만들던 사람이 있었다. 락희화학이 출시한 첫 제품으로, 세간에선 ‘동동구리무’로 통했다. 당시 행상들이 북을 두 번 친 뒤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를 외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제품을 직접 제조했던 사람이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고(故) 상남(上南)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었다.
24일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어릴 때부터 학교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는 1950년 아버지의 부름에 학교를 떠나 LG화학의 전신인 락회화학공업사에 입사했다. 허름한 야전 점퍼를 걸친 채 제품을 직접 만들고 공장을 지으며 현장 최일선을 누비던 모습은 당시 직원들에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1970년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해 1995년 물러날 때까지 그가 LG의 기틀을 쌓을 수 있었던 건 이런 현장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LG그룹은 구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을 하루 앞둔 23일, 그가 생전 강조했던 경영 철학을 재조명하는 영상 자료를 만들어 모든 계열사 직원에게 공개했다. 미국발 관세 전쟁과 가성비와 기술력을 앞세운 중국의 추격 등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그룹의 오늘을 있게 한 ‘초심’을 되새긴다는 취지에서다.
구 회장은 우리 재계에서 기업들이 ‘소비자’라는 말만 주로 쓸 때 고객(顧客)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대상이 아니라, 어원 그대로 끊임없이 돌아보며 챙겨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1991년 한국형 물걸레 청소기 출시를 앞두고 “신제품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고객에게서 나오니 고객이 우리의 스승입니다”라고 한 말은 지금도 LG의 핵심 철학이다.
구 회장이 서비스센터에서 만난 한 주부와의 대화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가 “우리 제품을 써보시니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봤는데, 이 고객이 “세탁기 뚜껑 좀 튼튼하게 만들어주세요. 우리 아이들은 옷을 벗어서 세탁기로 휙 던지는 습관이 있는데 뚜껑이 약해서 자꾸 부러져요”라고 한 것이다. 구 회장은 이 일을 계기로 첨단 기술이 능사가 아니라, 실제 고객 입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체감했다고 한다.
구 회장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이란 말이다. 대한민국을 국토는 작지만 기술이 뛰어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담겼다. 구 회장이 회장 재임 기간 만든 연구소만 70여 개에 이른다. 1976년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요즘의 R&D센터 격인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198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개설된 제품시험연구소에 국제적 수준의 시험실을 16개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높였다.
사회 공헌에도 힘썼다. 인재를 중시했던 선친의 뜻을 이어, 1974년 충남 천안에 연암대학교를 설립했다.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의 균형 잡힌 발전을 주도할 인재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또 1984년 경남 진주에 연암공과대학교를 설립해 기술 인재 양성에도 동시에 나섰다.
그의 퇴임 역시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재계에서는 그가 1995년 이른바 ‘무고(無故) 승계’로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일이 아직도 회자된다. 무고 승계란 충분히 경영할 수 있는 건강 상태에서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을 뜻한다. 당시 함께 창업 세대로 불렸던 구씨와 허씨 일가의 원로 회장단도 동반 퇴진했다. 구본무 회장과 새로 LG전선 회장이 된 허창수 당시 LG산전 부사장 등 ‘새로운 세대’가 소신 있게 경영 활동을 하도록 돕자는 배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