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로 만 92세가 된 리카싱(李嘉誠) 홍콩 청쿵(長江)그룹 창업자는 2년 전인 2018년 3월 회장에서 물러나 고문(senior advisor)을 맡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령자에게 흔한 기억력 약화나 치매와 거리가 멀다. 부(富)와 건강, 명예 세 방면에서 모두 여전히 순항하고 있다.

7년 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무명(無名)의 인터넷 화상(畫像)회의 전문 기업 ‘줌(Zoom)’에 대한 투자가 이를 웅변한다. 그는 2013년과 2015년 두 차례 3650만달러(약 433억원)를 투자해 ‘줌’ 지분의 8.5%를 보유했다. 작년 4월18일 상장 첫날 62달러이던 ‘줌’ 주가가 올 9월1일 457달러로 치솟아 리카싱의 자산 가치는 110억달러(약 13조원)로 불었다. 이달 12일 주가는 428달러로 마감했지만, 장부상 차액만 100억달러(약11조원)에 육박하는 ‘초대박’을 터뜨렸다. 최근 투자 실패가 부쩍 잦아진 미국의 워런 버핏(Warren Buffet)과 대비된다.

리카싱이 세운 '리카싱 기금회(Li Kashing Foundation)'의 장기 연구 지원으로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 UC버클리 교수(사진 왼쪽)가 2014년 당시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을 만나 찍은 사진./리카싱 기금회

◇'줌' 투자로 300배 이익...노벨상 수상자 2명 배출

올 10월에는 ‘리카싱 기금회’로부터 각각 9년, 10년 장기 지원을 받아온 과학자 2명이 2020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마이클 호턴(Michael Houghton) 캐나다 앨버타대 리카싱 응용바이러스학 연구소장은 노벨 생리의학상,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 UC버클리 교수는 노벨화학상을 각각 받은 것이다.

홍콩 언론매체들은 “리카싱 기금회의 연구 지원을 받아온 두 사람의 노벨상 낭보(朗報)를 접한 리카싱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밝혔다. 홍콩 상주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기자는, 2006년 10월20일과 10월25일 새벽에 각각 홍콩섬에서 리카싱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고령의 한계’를 뛰어넘어 활보(闊步·힘차고 당당한 걸음)하는 리카싱의 성공을 부른 세가지 인생 저력(底力)을 추적해 본다.

세계적 거부인 리카싱 청쿵그룹 창업자는 검소하고 담백한 생활을 평생 실천하고 있다. 매일 오전 5시59분에 일어나 출근전 새벽 골프(파3) 9홀을 돌거나 수영으로 건강관리를 해오고 있다. 2006년 10월25일 새벽, 당시 홍콩특파원이던 필자가 홍콩섬 딥워터베이에 있는 홍콩로얄골프클럽 앞에서 리카싱 회장을 만나 촬영했다./송의달 기자

◇첫번째 저력 : 10대 때부터 밴 ′평생 학습'

2017년 5월26일, 당시 89세이던 리카싱은 인공지능(AI) ‘알파고’를 만든 IT기업 딥마인드(DeepMind)의 창업자인 데미스 허사비스 최고경영자(CEO)와 응용AI부문 총괄책임인 무스타파 술래이만과 홍콩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허사비스 CEO가 AI 연구방향과 각종 응용에 대한 성과를 들려줄 때마다, 리카싱은 펜으로 메모하고 질문했다. ‘AI 과외수업’ 중간중간에 리카싱은 너무 흥분해 수차례 일어나기도 했다. 중국 웨이보에는 “아흔 살 고령인데도 고등학생처럼 열심히 메모하고 질문을 거듭하다니 대단하다” 같은 댓글들이 달렸다.

13살 때 소년 가장(家長)이 돼 찻집 종업원과 시계, 플라스틱 외판원으로 일한 리카싱은 하루 16시간 일하고 귀가해서도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책을 읽었다. 식구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가로등 밑에서 영어 공부를 한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950년 22살 때 5만 홍콩달러(약 750만원)로 청쿵플라스틱을 세워 사업을 시작한 그는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지혜와 학습과 노력뿐이라는 각오로 매진했다"고 말했다..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열심히 일하고 인내력과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식(knowledge), 특히 자신의 비즈니스 분야에서 가장 업데이트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2017년 5월26일, 당시 만 89세이던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맨 오른쪽)이 인공지능(AI)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 창업자들과 만나고 있다./리카싱 기금회

◇70대 중반에 AI 등 첨단 기술 공부 시작

1950년대 후반 ‘플라스틱 조화(造花)’로 홍콩의 거부(巨富)가 된 것도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책·잡지를 30분~1시간 정도 정독하는 ‘학습의 힘’ 덕분이었다. 리카싱은 1956년 어느 날 밤 영문 전문잡지 <플라스틱(Plastic)>에서 “이탈리아의 한 회사가 플라스틱 조화 시제품 생산에 성공해 곧 대량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기사를 읽고 무릎을 쳤다. 당장 이탈리아를 찾아간 그는 제품 관련 정보와 제조 노하우를 익혀와 플라스틱 조화 세계 최대 단일 공장을 운영했다.

70대 중반이던 2002년, 그는 호라이즌 벤처스(Horizons Ventures)라는 개인 벤처캐피탈 회사를 세우고 4차 산업혁명 관련 공부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이를 밑천으로 그는 유망 스마트업 초기 단계 투자자로 참여했다. 인터넷전화서비스 회사 스카이프(Skype·2005년)와 페이스북(Facebook·2007년), 음성인식기술기업 시리(Siri·2009년), 전자책(e-Book) 회사 코보(Kobo·2009년), 음악스트리밍업체 스포티파이(Spotify·2009년), 인공지능 스타트업 어펙티바(Affectiva·2012년) 등이 대상이다.

리카싱(사진 오른쪽) 청쿵그룹 창업자가 미국 식품 스타트업 '햄튼크릭푸드'가 개발한 인공 계란으로 요리하고 있다. 왼쪽은 조쉬 테트릭 '햄튼크릭푸드' CEO /바이두닷컴

그는 ‘비트코인’ 열풍이 불기 4년 전인 2014년 비트코인에 1억 홍콩달러(약 150억원)를 투자해 큰 돈을 벌었다. 뉴질랜드의 감정표현 AI 기업 소울머신(Soul Machines)은 물론 식물성 햄버거와 인공 계란 등을 만드는 실리콘밸리 ‘테크 푸드’ 기업들에도 활발하게 참여한다. 호라이즌 벤처스가 투자해 거둔 수익금 전액은 ‘리카싱기금회’로 보내 비영리 자선 활동에 모두 쓴다.

◇두번째 저력 : 무욕(無慾)과 깨끗한 부

블룸버그 억만장자지수에 따르면 리카싱의 개인 재산은 2020년 현재 326억달러(약 38조원)로 세계 26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외관으로 봤을 때 그를 ‘수퍼 리치(super rich·超富者)’로 여길 사람은 거의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명품(名品)을 찾을 수 없고 생활 자체가 검소하기 때문이다. 검은색 뿔테 안경은 평범한 제품이고, 양복은 검은색을 주로 입는데 최소 10년 넘게 착용한다. 구두는 밑창을 깔아 헤질 때까지 싣는다.

리카싱 청쿵그룹 전 회장이 요즘 차고 있는 손목시계. 3100위안(약 52만원)짜리 일본 시티즌(CITIZEN) 제품이다./바이두닷컴

'부유한 남성의 징표’인 손목시계도 마찬가지다. 요즘 그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는 3100위안(약 52만원)짜리 일본 시티즌(CITIZEN) 제품이다. 그나마 10년 전에는 6만원짜리 일본 세이코(SEIKO)제였다. 개당 수천만원짜리 손목시계를 여럿 사놓고 매일 또는 요일별로 바꿔 차는 중화권 부자들의 행태와는 판이하다. 그는 대신 손목시계의 시계바늘을 30분 앞당겨 놓고 있다. “만에 하나 약속을 잠깐 잊더라도 30분이면 홍콩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홍콩과 중화권 언론의 최근 보도를 종합하면, 리카싱이 회장 재임기간 중 받은 월급은 5000홍콩달러(약 75만원)로 건물 경비원이나 청소부보다 적었다. 출퇴근용으로 쓴 롤스로이스 승용차는 30년 넘게 탔고, 집에서 식사는 ‘국 한 그릇에 반찬 4개'로 단촐하다. 대신 만 52세이던 1980년 그는 스스로 ‘나의 세 번째 아들’이라 명명한 ‘리카싱기금회’를 세워 개인 전 재산의 3분의 1을 쏟아붓고 있다.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인 기금회가 지난해까지 출연한 기부금만 33억달러(약 3조6000억원)에 이른다.

리카싱의 좌우명은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오는 ‘의롭지 못한 채 부귀를 누림은 뜬구름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는 구절이다. 그는 “진정한 부는 자기가 번 금전을 사회를 위해 쓰려는 속마음에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바른 뜻(志氣)’이 없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리카싱 회장의 자선 사업은 단순히 돈을 기부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학교와 산골 벽지, 병원 등을 찾아가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격려한다. 중국 소수민족의 초등학교를 찾은 리카싱 모습/리카싱 기금회-조선일보 DB

◇세번째 저력 : 시대를 한발 앞서가는 先見

세번째 저력은 시대를 꿰뚫고, 시대와 호흡하며, 시대를 앞서나가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다. 리카싱은 시대 흐름을 한 발 앞서 주력 업종과 투자 대상 국가를 바꾸어왔다. 1970년대에는 홍콩 부동산으로, 1980년대에는 허치슨왐포아(Hutchison Whampoa·和記黃埔) 인수(1979년)를 신호탄으로 홍콩 및 영국 기업 인수로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1990년대 들어 리카싱은 덩샤오핑과의 단독 회담(1990년)을 계기로 중화권 기업들의 중국 대륙 투자 진출을 앞장서서 주도했다.

리카싱 청쿵그룹 창업자가 1990년 1월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사진 왼쪽)과 환담하고 있다. /조선일보DB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2008년)와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취임(2013년)을 계기로 그는 탈(脫)중국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단적으로 2015년에는 그가 세운 ‘홍콩 증시 1호 기업’인 청쿵실업의 등록지를 케이만제도(Cayman Islands)로 옮겼다. 홍콩 센트럴의 랜드 마크인 ‘더 센터’ 빌딩을 402억홍콩달러(약 6조원)에 매각하는 등 작년말까지 홍콩과 중국 대륙에서 24조원이 넘는 자산을 팔아치웠다. 그의 총재산 가운데 77%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청쿵그룹 총매출에서 홍콩과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0%, 9%로 줄었다. 유럽(47%), 호주·아시아(14%), 캐나다(12%) 등 서방 경제권에서 매출의 73%를 올리는 구조로 탈바꿈한 것이다. 리카싱 일가(一家)가 이끄는 CK애셋홀딩스는 작년 8월 46억파운드(약 7조원)를 들여 영국에 2700개가 넘는 펍(pub)과 식당·호텔 등을 보유하고 있는 최대 펍 체인그린킹(Greene King)을 인수했다.

리카싱 청쿵그룹 창립자가 2019년 8월 15일 홍콩 명보 등 언론 매체에 실은 광고. 중화권 언론과 네티즌들은 광고에 담긴 각 어절의 끝 글자를 따보면 '홍콩 사태의 원인과 결과는 중국에 있다. 홍콩의 자치를 용인하라(因果由國容港治己)'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고 분석했다. 리카싱이 홍콩 보안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조선일보 DB

◇"리카싱의 脫중국화...미·중 전쟁에 시사점"

그는 홍콩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해 오는 홍콩 시민들을 위해 런던 동남부 탬즈강 인근의 콘보이즈 워프(Convoys Wharf)에 12억6000만달러(약 1조 5000억원)를 들여 ‘홍콩 타운’ 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올 7월초 런던 루이셤구(區) 의회가 이 프로젝트를 승인함에 따라 사업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홍대순 이화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대를 앞선 투자로 눈부신 비즈니스 성공을 거둔 리카싱 회장이 중국과 홍콩을 떠나 서방으로 대거 자산과 투자를 옮기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격화되는 미국·중국 패권 경쟁의 향배와 관련해 의미있는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