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나스닥’을 노리는 베이징증권거래소가 15일 문을 열었다. 기존 중소기업 전용 장외 주식시장인 신삼판(新三板) 기업 7000여 개 중 우량 기업 71개와 신규 기업 10개 등 총 81개 종목이 상장됐다. 특별행정구인 홍콩을 제외하고 중국 본토에서는 상하이, 선전에 이어 세 번째 증권거래소다. 현재 200여 기업이 상장을 신청한 뒤 대기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증권거래소 첫 거래일인 이날 100% 이상 급등한 종목이 쏟아졌다. 자동차 부품 업체 퉁신(同心)이 494%, 전기 설비 업체 다디(大地)가 262% 폭등했다. 베이징증권거래소는 첫 거래일에는 상·하한가를 두지 않고, 상장 다음 날부터 중국에서 가장 높은 상하 30%의 가격 등락 폭을 적용한다. 최소 매매 주문 단위는 기존 상하이·선전 증시처럼 ‘100주 이상’이고, 거래 시간은 오전 9시 30분~11시 30분, 오후 1~3시다.
◇순익 55억원 이상 우량 중소기업 위주 상장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과 출범은 중국 빅테크 기업을 통제하려는 중국 당국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중국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중소기업 육성 자금 조달 창구로 활용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정부 방침에 따라 베이징증권거래소에는 주로 혁신 중소기업들이 상장된다. 순이익 3000만위안(약 55억원) 이상 기업들이 84%를 차지한다. 지난 상반기 매출·이익 증가 속도가 빠른 종목으로는 베이터루이(貝特瑞)·지린탄구(吉林碳谷)·우신수이좡(五新隧裝) 등이 꼽힌다. 리튬 전지 기업인 베이터루이는 지난 3분기 이익이 11억1400만위안(약 2057억원)에 달했다. 탄소섬유 업체인 지린탄구는 신삼판 핵심층에 등록 후 2개월 만에 기업 가치가 6배 뛰기도 했다.
◇소액 투자자와 외국인 참여는 일단 불허
베이징증권거래소 상장 기업들은 성장 초기 단계여서 투자 위험이 크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이에 따라 투자 자격도 투자 경력 2년 이상이며 주식 계좌의 20일 평균 잔액이 50만위안(약 9230만원) 이상인 경우로 제한된다. 전문 투자자와 기관 위주로 운영될 전망이다. 일반 소액 투자자는 참여할 수 없고 외국인들에게는 규정을 정비한 뒤 추후 문을 연다는 방침이다.
대부분 상장 기업 규모가 작은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선전·상하이 증권거래소의 기술·벤처 전문 거래소인 촹예반(創業板)·커촹반(科創板)은 진입 조건으로 기업 가치 10억위안(약 1850억원)을 내걸었지만 베이징증권거래소는 2억위안(약 370억원)이면 된다.
◇시진핑 경제 권력 강화 의도
베이징증권거래소는 내년 가을 3연임을 추진하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상하이증권거래소 등을 배경으로 하는 상하이 출신 정치 세력을 견제하고 권력을 공고화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실제 지난 9월 초 시 주석이 처음 개설 방침을 밝힌 뒤 2개월도 채 안 돼 준비를 마치는 등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시 주석이 외교·정치·경제 등 권력 분야를 나눈 전임자들과 달리 경제까지 거머쥐려고 한다는 말이 나온다. 지난 9월 시 주석은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 발표를 리커창 총리에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했다. 당시 시 주석은 “우리는 계속해서 중소기업의 혁신과 발전을 지지할 것”이라며 “베이징증권거래소 설립으로 혁신형 중소기업의 주(主) 진지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자금과 기술 빨아들이려는 의도
베이징증권거래소 개장은 미국과의 규제 마찰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왔다. 이달 초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외국 기업 증시 퇴출 규정을 승인했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에 대한 미국 당국의 회계 감리를 중국 정부가 수년째 거부하자 아예 퇴출 규정을 만든 것이다.
중국도 이 기회에 미국에서 발을 빼는 모양새다. 차량 공유 스타트업 디디추싱(滴滴出行)이 6월 말 미국 증시에 상장하자 국가 안보를 위협에 빠뜨렸다는 혐의로 조사에 들어갔고, 디디추싱을 포함해 미국 증시에 상장한 3사에 지난달 홍콩 증시 상장을 압박하기도 했다. 지난 7월에는 자국 인터넷 기업이 미국 등 해외 증시에 상장하려면 사전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밝혀 해외 상장을 허가제로 바꿔버렸다. 지난 14일에는 홍콩에 상장하는 경우에도 사전 심사 통과 조건을 더해 국제 금융 허브인 홍콩 역시 ‘외국’에 준해 관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미국의 기술 봉쇄에 대응한 궁여지책이지만 궁극적으로 선전·상하이와 베이징을 합해 미국 나스닥을 넘어서는 세계 최대 기술주 거래 시장을 만들어 세계 자금과 기술을 빨아들이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