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지난달 19일 미국 시장조사회사 가트너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1년 세계 반도체기업 매출 순위에서 미국 인텔을 제치고 2018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일각의 한국 반도체 위기론에도 불구하고 실적으로 증명했죠.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 상승, 출하량 증가에 힘입어 2020년 대비 매출이 32% 올랐습니다.
그런데 작년 세계 반도체기업 매출순위 톱10을 살펴보면, 의아한 부분이 2가지 보입니다.
2가지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순위를 먼저 살펴볼게요. 1~5위는 삼성전자(한국), 인텔(미국), SK 하이닉스(한국), 마이크론(미국), 퀄컴(미국)이고요. 6~10위는 브로드컴(싱가포르·미국), 미디어텍(대만), 텍사스인스트루먼트(미국), 엔비디아(미국), AMD(미국)입니다.
그럼 의아한 2가지가 뭐냐 하면요.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전문회사) 분야 절대강자인 대만 TSMC가 순위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TSMC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소한 미디어텍이라는 대만 회사가 TSMC 대신에 전 세계 7위에 랭크돼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아한 점부터 설명드려 볼게요. TSMC의 작년 매출은 570억 달러였는데요. 매출로 보면 삼성전자 (반도체부문·759억 달러), 인텔(731억 달러)에 이어 3위입니다. 그런데도 TSMC가 순위에서 빠진 것은 ‘이 회사가 자기 브랜드로 반도체 최종제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팹리스(fabless)의 요청을 받아 그 회사 제품을 대신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TSMC가 대신 만들어준 제품은 가트너 집계에서 ‘TSMC가 아니라 TSMC에 제조를 위탁(委託)한 회사의 매출로 잡힌다’는 것이죠. TSMC 매출을 전부 반영해 순위에 올린다면, 같은 제품에 대한 매출이 중복으로 잡힐 겁니다. 그래서 TSMC가 순위에 안 보이는 겁니다.
◇대만 팹리스 미디어텍, 세계 AP시장 점유율 40%... 미국의 퀄컴 누르고 압도적 1위
여기서 잠시 팹리스를 설명하고 넘어가면요. 제조설비(fab·fabrication)에 ‘없다’는 뜻의 접미사(less)를 합성한 말로, 제조설비 즉 공장을 보유하지 않고 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해 각종 시스템 반도체를 내놓는 회사를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퀄컴·브로드컴·미디어텍이 세계 매출 톱3에 드는 팹리스이죠. 이런 회사들이 자신들이 설계한 반도체의 제조를 위탁하는 회사, 그 회사 입장에서 보면 ‘수탁(受託) 제조사(공장)’가 바로 파운드리입니다. 첨단 제품 중심으로 세계 파운드리 매출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괴물 기업인 TSMC, 점유율 20%가량으로 TSMC의 뒤를 쫓는 삼성전자(파운드리 부문), 업계 3·4위인 UMC(대만)와 글로벌파운드리(미국) 등이 바로 그런 회사들이죠.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이제부터가 두 번째 의문에 대한 설명이자 본론입니다. 대만 미디어텍의 놀라운 약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최근까지 아시아 팹리스의 양강(兩强)이라고 하면, 미디어텍과 함께 중국 화웨이 산하의 하이실리콘을 꼽았었죠. 하지만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 여파로 하이실리콘 매출이 급전직하, 순위권 바깥으로 멀찌감치 밀려난 상황이고요. 하이실리콘에서 빠진 5G대응 스마트폰용 반도체 수요를 그대로 가져간 미디어텍이 이젠 아시아 원톱의 팹리스로 올라섰습니다.
사실 전 세계의 국가별 팹리스 경쟁력으로 따지면, 대만은 미국 다음입니다. 미국 조사회사 IC인사이츠(2020년 집계)에 따르면, 국가별 팹리스 매출 점유율은 미국이 64%, 대만이 18%, 중국이 15%, 한국과 일본이 각각 1% 정도였습니다. 팹리스 경쟁력에서는 한국·일본이 대만·중국을 넘보기 어려운 수준이죠. 2021년에는 대만이 중국과의 점유율 격차를 더 벌렸을 겁니다.
메모리 등을 포함한 전체 반도체 점유율에서 미국이 55%, 한국이 21%로 각각 1·2위, 대만이 3위(7%), 일본(6%)·중국(5%)이 각각 4·5위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튼 대만은 파운드리에서도 세계 원톱이지만, IT 제품의 두뇌 역할을 하는 각종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는, 미래로 갈수록 점점 중요해지는 팹리스 분야에서도 아시아 최강이라는 것입니다.
반도체의 성격은 두 가지입니다. 컴퓨터가 일 할 때 데이터를 기억해 놓았다가 꺼내 쓰는데 필요한 메모리 반도체, 그리고 계산작업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시스템 반도체이지요. 컴퓨터에 들어가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중앙처리장치), 게임이나 AI 운용에 필수인 GPU(Graphic Processing Unit·그래픽처리장치), 스마트폰 등의 두뇌인 AP(Application Processor), 자동차·가전 등 각종 제품 제어에 쓰이는 MCU(Micro Control Unit) 등 메모리를 뺀 대부분이 시스템반도체인 셈입니다.
한국은 세계 1·2위 메모리 회사(삼성전자·SK 하이닉스)가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어내는 두뇌기업인 팹리스 분야에선 미국·대만·중국 등에 비해 불모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만의 미디어텍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가 주력 사업인데요. 2011년 시장 진입 이후 9년만에 업계 최강자가 됐습니다. 2020년 말 퀄컴을 누르고 1위에 등극했고요. 작년 3분기에는 AP 세계 점유율 40%로, 2위 퀄컴(27%)과의 격차를 점점 벌리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퀄컴은 AP분야에서 넘사벽의 존재로 여겨졌었는데, 5~6년 전까지만 해도 싸구려 AP 개발업체의 대명사 취급을 받았던 미디어텍이 최강 퀄컴을 무너뜨린 겁니다.
한편 작년 3분기 기준으로 AP 점유율 3위는 15%를 차지한 애플이었고요.(자사 제품에 들어가는 AP를 전부 자신들이 개발해 생산만 TSMC에 위탁하고 있으니까요) 4위는 10%를 차지한 중국 팹리스 유니SOC였습니다. 삼성전자는 점유율 5%로 5위에 그쳤습니다. 삼성은 안드로이드폰 세계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라, 자사 제품에만 자체 AP를 탑재해도 점유율이 크게 오를 것 같은데요. 삼성전자의 AP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삼성이 자체 개발한 AP가 고가·고성능 제품에 주로 들어가는 데다, 그 급에서조차 퀄컴 제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죠. 삼성전자도 주력인 중저가 라인업은 미디어텍 AP나 퀄컴의 저가 라인업 AP를 많이 사용합니다.
앞으로의 상황도 녹록지 않습니다. 업계 1위를 굳힌 미디어텍이 지금까지는 중저가 라인업에만 치중해 왔지만, 최근 들어 퀄컴·삼성 등의 고가·고성능 AP 시장까지 치고 들어오고 있거든요. 워낙 물량이 많고 고객사도 많고 축적된 기술력도 있기 때문에, 미디어텍이 프리미엄급 AP 시장을 일부 잠식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디어텍, 작년 세계 반도체 기업 7위... 팹리스로는 퀄컴·브로드컴과 함께 글로벌 톱3에 들어
이런 상황 덕분에 미디어텍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작년 전 세계 반도체기업 7위를 기록하게 됐고요. 전 세계 팹리스 순위로만 따지면, 미국의 퀄컴·브로드컴에 이어 당당 3위입니다. 지난달 27일 발표된 미디어텍의 작년 4분기(10~12월) 매출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순이익만 300억 대만 달러(약 1조3000억원)로 전년 동기의 약 2배,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작년 전체로는 매출이 2020년 대비 53% 증가한 4934억 대만 달러(21조3000억원), 순이익은 2.7배 증가한 1114억 대만 달러(약 4조8000억원)였습니다. 참고로 미디어텍의 시가총액은 올해 2월9일 기준으로 1조8100억 대만 달러(약 78조원) 정도입니다. 코스피에 단순 대입하면, SK하이닉스에 이어 4위 수준입니다.
한국의 팹리스 상황과 비교하면 탄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국의 팹리스 상장사 상위 20곳 매출을 전부 합쳐봐야 미디어텍 한 곳의 1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한국에서도 대형 팹리스를 키워야 한다며 20년 전부터 갖은 방안이 나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척박합니다. 미디어텍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의 팹리스 발전에 필요한 아이디어가 이 업체 역사에 집약돼 있기 때문입니다. 미디어텍의 약진이 한국에 주는 교훈을 5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1. 삼성전자의 시스템LSI 사업부가 10년 전 독립했더라면, 한국의 미디어텍이 됐을지도 모른다
미디어텍의 약진, 아시아에선 독보적인 존재이자 월드클래스 팹리스로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삼성전자의 시스템LSI 사업부가 10년 전 독립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것입니다. 삼성전자는 세계 1위 메모리기업인 동시에 세계 2위 파운드리기업이고, 반도체설계업체(팹리스)로만 따져도 스마트폰 AP 분야 세계 5위입니다. 세계적으로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이 분야에서 3개 분야 모두를 하고 있고, 2개 분야는 각각 세계 1·2위를 하는 괴물기업이 바로 삼성이죠.
그런데 삼성전자의 시스템LSI 사업부는, 할 수 있었던 기회와 역량에 비해 성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AP를 개발하는 시스템LSI 사업부가 만약에 10년 전 쯤에 독립했었더라면, 어쩌면 지금의 미디어텍과도 겨룰 수 있는 위치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7~8년 전만 해도 미디어텍은 저가 AP나 만들던 업체,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은 업체였거든요. 미디어텍이 AP시장에 처음 진출한 2011년만 해도 외견상의 경쟁력은 한국이 오히려 월등했습니다. 삼성은 2010년 출시한 갤럭시S1에 이미 자체 AP를 탑재한 반면, 미디어텍은 당시 시장 진입도 못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삼성전자가 2010년이라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자체 AP를 탑재한 프리미엄 안드로이드폰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죠. 삼성이 2007년 등장한 아이폰 1세대부터 2009년까지 애플의 AP를 대신 생산해주는 과정에서 스마트폰과 AP 개발에 대한 상황과 전망을 어떤 다른 업체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애플을 포함해 모든 업체가 막 AP시장에 뛰어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AP를 발판으로 설계전문(팹리스) 분야에서도 도약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삼성전자라는 세계 톱클래스의 스마트폰·가전업체 산하에 있으면서, 이들을 최우선 고객으로 삼아야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축복인 동시에 비극일 수 있는데요. 비극의 관점에서 두 가지 큰 제약을 안깁니다.
첫 번째는 외부 고객이 삼성 시스템LSI에 일감 주는 걸 꺼리게 된다는 겁니다. 삼성의 경쟁사들이 삼성의 시스템LSI 사업부에 반도체를 주문하면 자산들 기밀정보가 삼성의 스마트폰·가전 사업부 쪽으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삼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만, 애플이 아이폰 초창기에 삼성에 생산을 맡겼다가 빠지고 TSMC하고만 일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겁니다.
두 번째는 좀 더 깊은 얘기인데요. 삼성의 시스템LSI가 모시는 삼성 내부 고객의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프리미엄급인 갤럭시폰에 들어갈 AP, 즉 퀄컴 같은 뛰어난 팹리스의 고성능 AP와 겨룰 수 있는 뛰어난 AP만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LSI 사업부의 능력을 봉인시키고 운신의 폭을 극도로 제한했다는 겁니다.
실리콘밸리 천재들이 만든 기업인 퀄컴은 일단 빼고요. 대만의 미디어텍만 예로 들어보죠. 미디어텍은 삼성보다 늦은 2011년에 처음 스마트폰 AP시장에 진출했고, 처음엔 기술력도 대단치 않았습니다.(물론 그전까지 피처폰·통신용 칩세트 개발·판매에서 축적한 내공과 중국 중심의 다양한 고객 네트워크가 강점이긴 했죠) 하지만 저가AP, 특히 중국 스마트폰업체를 상대로 수주를 받아 차츰 물량을 늘려가고 기술력도 쌓고, 또 고객사들의 까다로운 요청에 대응하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차츰 실력이 붙게 되죠. 그렇게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포함한 세계시장에서 다양한 일감을 따오면서 고객과 함께 커 나가다 보니 어느새 세계 3위, 아시아 원톱의 팹리스가 돼 있더라는 겁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LSI 사업부는 미디어텍이 10년간 겪었던 혹독한 수련과정을 겪을 기회를 원천봉쇄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10년 전 독립해서 전 세계 고객을 상대로 죽기 살기로 경쟁했더라면 어땠을까요?
현재 상황만 놓고보면,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가 독립했더라도 미디어텍 같은 대형 팹리스는 되지 못했을거라고 단정해 버릴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10년 전의 미디어텍과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의 기술 수준 격차는 지금처럼 미디어텍이 넘사벽으로 커져버린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고 봅니다. 당시로서는 양쪽이 충분히 경쟁 가능했거나 오히려 삼성 쪽이 더 유리한 부분도 있었죠. 시스템LSI가 독립해 뛰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하고, 세계를 무대로 고객과 개발 인재와 자본을 모을 수만 있었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팹리스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국내에 크고 작은 팹리스가 있지만 매출규모로 따지면 아주 작습니다. 냉정히 말해 한국이 지난 10년간 글로벌 규모의 팹리스를 만들 기회가 있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삼성전자의 시스템LSI 사업부 독립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미디어텍이 가졌던 이 절호의 팹리스 도약 기회를 한국이 놓쳤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혹자는 ‘한국이 이미 메모리 1위이고, 파운드리도 2위인데, 굳이 팹리스(시스템반도체 설계회사)에서도 글로벌기업이 나와야 하느냐’고 물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IT산업 전망으로 볼 때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 돼 가고 있습니다. 컴퓨터·스마트폰에 이어 이제는 자동차 그리고 IoT 분야(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도 마찬가지죠)에서도 고도의 시스템 반도체가 들어가는 세상이 되고 있죠. 이 분야를 놓친다는 것은 우리의 미래 먹을거리의 큰 부분을 놓치는 것, 우리가 가진 역량의 활용 가능성을 봉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에 글로벌 팹리스가 한 곳이라도 있으면,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을 키워 TSMC와 경쟁하는데도 절대적으로 유리해집니다. TSMC와의 경쟁이라는 것이 현재는 첨단 미세공정 싸움인데, 그런 첨단공정을 써주고 끊임없이 피드백을 해줄 초우량 고객이 한국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뛰어난 팹리스는 본인들 기술력에 맞는 높은 기준의 까다로운 주문을 하게 마련이죠. 이런 생산주문을 받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자체가 파운드리로서는 실력을 쌓아나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한국에 뛰어난 팹리스가 생기면, 파운드리가 성장하는 것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라도 한국판 미디어텍을 만들어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AP시장은 이미 철옹성을 구축한 애플, 안드로이드 진영이라면 퀄컴과 미디어텍의 싸움으로 굳혀진 상황이니까요. 그렇다면 다른 방안이 있을까요? 그것은 이 글의 5번에서 살짝 다뤄보겠습니다.
◇2. 기술의 큰 흐름이 바뀔 때가 팹리스 성장의 거의 유일한 기회다
미디어텍은 시장 방향을 제일 먼저 파악하고 고객사가 원하는 기술을 가장 빨리 쓸 수 있게 제공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020년 이후 5G라는 스마트폰 통신규격 변화에 가장 빨리 대응한 것이죠. 전 세계 스마트폰 고객사가 원하는 5G 칩세트(Chip Set)를 가장 빨리 싼 값에 믿을만한 품질로 제공했습니다.
미디어텍이 4G 시대엔 퀄컴을 이기지 못했지만, 고가부터 중저가까지 5G 스마트폰용의 다양한 AP와 관련 반도체군(群)을 개발해 오포(OPPO)·비보(Vivo)·샤오미 등 중국의 거의 모든 제조사 5G폰 물량을 장악했습니다.
기술이 바뀌는 시점에서 새 기술을 선점해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은 미디어텍 창업 때부터 반복된 것입니다. 원래 미디어텍은 대만 파운드리인 UMC의 사내 조직으로, 컴퓨터의 CD드라이브용 LSI(고밀도집적회로)를 설계하는 곳이었거든요. 그러다가 1997년 분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미디어텍은 대만의 소규모 팹리스 중 한 곳에 불과했습니다. UMC는 현재 TSMC·삼성전자(파운드리사업부)에 이어 세계 3위 파운드리입니다. TSMC라는 큰형님에 많이 밀리긴 하지만, 최고는 아니라도 나름 잘나가는 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텍이 1997년에 UMC에서 독립하지 않고 UMC 내부의 한 부서로 계속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미디어텍이라는 존재는 없었겠죠. 아시아 최강의 팹리스라는 자부심을 안고 전 세계 고객을 상대로 종횡무진 움직이는 미디어텍의 인재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독립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UMC의 작은 부서로, 회사에 필요한 설계 업무를 맡아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채 작은 규모로 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사내 우선순위에서 밀려 설계 담당 직원들의 불만만 쌓여갔을 수도, 어쩌면 소리 소문 없이 부서가 정리돼 사라졌을지도 모르죠.
◇3. 고객 이익을 최우선으로 장기관계 구축하며 동반 성장
미디어텍이 UMC에서 독립했던 초기는 광디스크 시장이 CD에서 DVD로 바뀌는 중이었는데요. 이때 미디어텍은 DVD 전용 LSI(large Scale Integration·고밀도집적회로)를 개발해 기존의 업계 선두였던 일본 도시바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습니다.
20년 전 미디어텍이 일본 업체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공급자가 아닌 고객 이익에 집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업체는 DVD 드라이브에 필요한 여러 칩을 따로 팔았습니다. 이게 일본업체들, 즉 칩을 고객사에 파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편했죠. 심하게 말하면 “우리는 따로따로 팔 테니 고객님은 알아서 사가세요”입니다.
반면 미디어텍은 영상재생용 칩과 모터제어용 칩 등을 묶어 완제품에 가깝게 제공했습니다. 납품단가도 일본 부품을 각각 사는 것보다 저렴했지만, 무엇보다도 고객사의 시스템 개발 수고를 덜어준 게 큰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렇게 고객사 사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쪽으로 계속 머리를 짜낸 결과, 2000년대 중반 미디어텍은 DVD용 칩 세계 시장의 50%를 석권하기에 이릅니다. 그 사이에 일본업체들은 하나 둘 도태됐지요.
DVD 드라이브 시장을 제패한 미디어텍은 2004년 중국 피처폰용 칩 시장에도 진출하게 됩니다. 당시 TI(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기존 업체는 통화 기능밖에 없는 단순 제품을 중국시장에 팔고 있었습니다. 미디어텍은 동영상·음악 재생이 가능한 다기능 칩을 경쟁사와 비슷한 값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죠.
당시 중국에선 소비자들 소득이 빠르게 오르는 상황이었는데요. 미디어텍은 중국에서도 동영상·음악 재생기능을 탑재한 제품이 인기를 끌 것이라 예상하고, 여기에 개발력과 물량을 집중했습니다. 미디어텍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고요. 2008년이 되면, 휴대폰 칩이 미디어텍 매출의 50%를 넘을 만큼 주력 상품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이것은 미디어텍과 고객사가 장기적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해 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포는 원래 DVD·MP3 플레이어 업체였지만, 2008년 미디어텍 칩세트를 활용해 MP3플레이어 기능을 탑재한 피처폰을 내놓으며 휴대폰 업체로 변신했죠. 이런 제품을 빠르게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텍의 다기능 칩 덕분이었습니다. 오포는 미디어텍 칩으로 다기능폰을 내놓아 소비자를 잡았고, 미디어텍은 오포 덕분에 자신들의 칩을 많이 팔게 됐으니, 윈윈의 관계였던 거죠. 이런 관계는 훗날 샤오미·오포·비보(오포의 형제회사) 등의 스마트폰과 미디어텍 AP 조합으로까지 계속 발전하게 됩니다.
◇4. 칩세트 뿐 아니라 레퍼런스 보드와 소프트웨어 패키지까지 제공하는 ‘토털 솔루션’이 진짜 경쟁력
미디어텍은 여세를 몰아 TV·무선통신 칩세트 시장에 차례로 진출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2002년 이후 7년 만에 매출이 4배 성장하는 놀라운 실적을 보여주죠. 하지만 2007년 아이폰 등장의 여파로 2010년에 실적이 급격히 꺾이며 위기를 맞습니다. 피처폰용 칩만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미디어텍은 2011년 스마트폰 AP시장에 뛰어들었고, DVD·휴대폰·TV·통신 칩에서 검증된 통합 서비스전략을 구사해 또 성공을 거둡니다.
연이은 성공 원인은 칩세트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검증된 레퍼런스 보드(칩세트와 관련 부품을 기판에 꽂아 실제로 동작하게 한 것)를 묶어 제공하는 ‘토털 솔루션’에 있었습니다. 이 솔루션을 사용하면 시스템 기술력이 낮은 중국업체도 최신 스마트폰을 값싸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죠. 중국 신흥 가전·휴대폰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한 데는 미디어텍의 이런 종합적인 기술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최근 들어 미디어텍의 진짜 경쟁력으로 지목되는 것이 BSP(Board Support Package)라는 것인데요. 앞서 미디어텍이 칩세트만 파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칩세트와 다른 부품을 꽂아 “이렇게 만들면 됩니다”라고 고객사에 동작 여부와 검증된 성능까지 보여주도록 거의 완제품 형태의 보드(PCB·Printed Circuit Board, 인쇄회로기판)까지 제공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미디어텍이 정말 뛰어난 것은 이 보드를 돌리는 데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를 하나의 묶음(BSP)으로 제공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완성도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말입니다. 중국의 신흥 스마트폰업체를 예로 들어보죠. 스마트폰업체는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기 때문에, 제품도 잘 만들어야 하지만 브랜드 이미지나 고객체험 관리 등이 매우 중요하죠. 이 업체가 미디어텍으로부터 AP를 구입한다고 쳐보겠습니다. 그러면 미디어텍은 AP라는 반도체 하나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AP 이외에도 카메라칩이나 각종 센서 등의 부품을 전부 꽂아 최적으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한 표준 기판(레퍼런스 보드)까지 제공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기판을 돌릴 소프트웨어 묶음까지 세트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거죠.
최종제품 개발자 즉 스마트폰업체 내부의 개발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할 일이 줄어들고 일이 아주 편해집니다. 원래 내부 개발자들은 외부에서 AP를 사고, 다른 부품도 사고, 그것으로 기판을 꾸미고, 거기에 돌리는 소프트웨어도 조정하고, 모든 요소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오류가 생기지는 않는지 등을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 검증해야 하죠.
그런데 미디어텍과 거래하게 되면, 이런 수고를 싹 다 미디어텍 쪽에서 해결해준다는 겁니다. 이미 검증까지 끝난 상태로 모든 것이 하나의 패키지로 들어오기 때문에, 스마트폰 업체 입장에서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스마트폰 껍데기만 만들고 디자인과 마케팅·고객관리에만 신경 쓰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삼성처럼 프리미엄 지향에 내부 기술력과 큰 시장을 가진 업체라면, 미디어텍 칩을 가져다 쓰더라도(실제로도 삼성 중저가 폰에는 미디어텍 AP를 많이 씁니다) 미디어텍이 주는 그대로 쓰지 않고 삼성 기준에 맞춰 고치지만, 기술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중국 신생업체들이라면 그냥 미디어텍이 주는 대로 받아서 만들면 되는 겁니다. 중저가 라인에서는 미디어텍이 칩은 물론이고 BSP도 충분히 안정화돼 있으니까, 중저가 스마트폰 업체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솔루션인 거죠. 물론 퀄컴도 비슷한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합니다만, 비싸니까요. 중저가 스마트폰에 많이 쓰긴 쉽지 않죠.
미디어텍은 이런 토털 서비스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면서, 고객사에서 어떤 애로가 생기면 발 빠르게 해결해는 주는 걸로도 유명합니다. 공급자가 아니라 수요자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객사가 어떻게 하면 더 쉽고 편하게 제품을 개발할 수 있을까를 우선하는 기업문화·서비스마인드, 이것이 축적되면서 완성형에 가까운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 것이 미디어텍이 AP시장 1등으로 올라서게 된 비결이 아닐까 합니다.
◇5. 수요와 고객이 끌어주지 않으면, 한국의 대형 팹리스 등장은 앞으로도 어렵다
미디어텍의 토탈 솔루션 전략은 한국 팹리스 육성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고객이 안 사주면 모든 게 허사이기 때문이죠. 미디어텍의 성공은 고객을 가장 만족시켰기에 가능했습니다. 더 많은 고객이 선택해 줬고, 미디어텍은 거기에 더 좋은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면서 선순환 구조가 일어난 거죠.
반면 한국 정부나 민·관 컨소시엄 육성책을 보면 이런 기업 성장의 ABC가 무시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K 반도체’라며 한국형 시스템 반도체를 만든 사례도 있지만, 수요처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죠. 반도체를 만들어봤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고객이 쓰고 만족해야 한다는 게 정말 중요한데요. 고객사가 자신들의 제품·서비스에 맞는 높은 성능지표를 팹리스에 정확히 요구하고, 팹리스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며 그 요구를 맞춰내는 과정이 반복돼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야만 고객사·팹리스 양쪽 모두가 이익을 얻고 경쟁력도 높아질 겁니다. 정부가 과제를 만들고 예산을 잘게 쪼개 배분해 국내 팹리스의 반도체 개발을 지원한다고만 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지난 20년간 대만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계획 아래 자국의 최고 인재와 중화권 공급망의 혜택까지 누린 미디어텍 같은 곳을 따라잡는 게 쉽진 않겠지요.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국내 설계역량을 높이고, 인력을 양성하고, 제품을 소화해줄 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만들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절실해 보입니다.
가장 나쁜 것이 이거 한번 해봤다가 안되면 저거, 이 프로젝트에 찔끔, 저 프로젝트에 찔끔, 하다 안되면 접고, 다음 정부에선 아예 새로운 분야, 새로운 기업에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그 예산을 다른 데 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이 낸 피 같은 세금을 한 푼이라도 소중하게 써야 하겠죠.
처음에는 성과가 잘 나오지 않더라도, 정권이 바뀌더라도, 윗사람이 바뀌더라도, 긴 안목으로 고객과 함께 성장해나갈 수 있는 한국 팹리스 지원책을 만들어야 할 텐데요. 정부의 지원뿐 아니라 사실은 기업가정신에서 나오는 부분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해결책이 딱 뭐라고 말하긴 참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
다만 모바일 분야 등에서 퀄컴·미디어텍과 같은 대형 팹리스를 기대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미디어텍이 그랬듯 기술의 큰 흐름이 바뀔 때를 노릴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기술의 큰 흐름이 바뀌는 자동차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반도체 하나를 개발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기술의 큰 흐름의 맥을 잘 잡고, 미래차의 반도체를 포함한 전체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깊고도 긴 안목이 요구됩니다.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가 SDV(Software Defined Vehicle·차량 기능이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는 차, 무선업데이트로 기능이 개선되는 차) 개발의 큰 그림을 그린 뒤 국내 팹리스와 연계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그렇게 하려면 현대차 내부에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가는 미래차 기술의 맥을 제대로 짚고 단·중·장기 플랜을 짜줄 월드클래스급의 ‘아키텍트’가 있어야 할 테고요. 그런 천재만 필요한 게 아니라,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할 뛰어난 개발자들도 아주 많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이 제안이 자칫 정부가 민간기업인 현대차와 실력이 부족한 특정 국내 팹리스를 엮으려는 식으로 이어질 경우, 현대차의 경쟁력마저 떨어뜨릴 위험이 있지요.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대차는, 필요하다면 해외 팹리스와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물론 현대차가 내부역량을 키우고 국내 팹리스까지 함께 육성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현대차 내부에 그런 역량과 여유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지도 확실치는 않습니다.
현대차는 현대차대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그 외에는 국내에서 중국의 샤오펑·니오·리오토처럼 SDV를 만드는 스타트업이 나와줄 수 있다면 좋겠죠. 이들 업체를 발판으로 국내 팹리스가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쉽진 않죠. 테슬라 등의 예를 봤을 때, 모든 리소스를 동원하고 천재급 반도체 아키텍트를 스카우트해 전력을 다한다 해도, SDV에 들어가는 고성능 통합제어 프로세서를 독자 개발하는데 2년가량의 시간과 1조원 내외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하니까요. 다만 자동차 분야에서 큰 기술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만큼, 어떻게든 자본과 사람을 모으고, 정부의 장기적 육성책, 무엇보다 뛰어난 기업가정신이 어우러져, 한국에서도 대형 팹리스가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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