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오전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의 명품 오픈런 행렬. /뉴시스
12월 23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오픈런 현장. /한경진 기자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23일 새벽 4시30분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한밤 중처럼 날이 어두웠다. 백화점 옆 고속터미널 입구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 5도.

백화점 지하 3층 C60~90 구역에 주차→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 터미널로 이동→멈춰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계단 삼아 올라가시오→2층에서 왼쪽으로 꺾은 뒤→불 꺼진 불가리와 에르메스 매장 사이에서 대기.
SNS '신강 오픈런' 매뉴얼

‘그곳’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다. 이 루트는 백화점 개장 시간(오전 10시30분)에 맞춰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개구멍’으로 통한다. 처음 도착했을 때 3명 뿐이던 대기 인원은 10~20분 만에 7명으로 늘었다. 달팽이처럼 롱패딩에 몸을 푹 파묻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철야 행군에 나섰다.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운동화 고무 밑창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12월 23일 새벽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오픈런 대기 현장. 캠핑 의자는 필수! 돗자리 펴고 누워 코를 고는 사람도 보였다. /한경진 기자

요즘 서울 주요 백화점에선 매일 새벽 노숙 행렬이 나타난다. “욕 하면서 산다”는 명품 중의 명품, 샤넬과 롤렉스 매장에 빠르게 침투하기 위한 ‘혹한기 훈련’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샤넬과 롤렉스는 가격 인상도, 상품 유통도 기습적이다. 샤넬 대표 모델인 클래식 플랩백(미디엄 사이즈)은 2019년 715만원에서 현재 1124만원으로 57.2% 뛰었다. ‘총알(돈)’이 있다한들, 구할 수 없다. 롤렉스 서브마리너 시계가 현대백화점 본점에 풀릴지 광주 신세계백화점에 풀릴지, 일반 소비자들은 알지 못한다.

12월 23일 새벽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2층. 철창살 틈으로 하얀 드레스를 걸친 마네킹이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위로 ‘번쩍’ 빛나는 검은 로고, CHANEL! /한경진 기자

이날 찾은 ‘신강’(신세계 강남점) 점포는 서울 백화점 중 유일하게 ‘실내 대기’가 가능해, 명품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른바 ‘오픈런 맛집’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신강 2층 에르메스 복도는 샤넬이 불시 투척할 ‘미확인 발사체’를 적시 파악할 수 있는 ‘소비의 최전선’이다. 적막감과 삼엄함이 맴돌던 그곳에서 기자도 6시간 동안 뜬 눈으로 동태를 살펴봤다.

오픈런(open-run): 백화점 문이 열리자마자 상품 매장으로 쇼핑을 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 2020년 5월 샤넬 가격 인상을 앞두고 미리 제품을 구입하려는 소비자들이 백화점에 장사진을 치면서 ‘샤넬 오픈런’ 이라는 신조어가 본격 확산했다.
신세계 강남점 신관 2층 에르메스와 불가리 매장 사이 복도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실내 대기'가 가능한 샤넬 오픈런 장소다.

◇샤넬 노숙인의 탄생

이날 현장에 1등으로 도착해있던 직장인 최모(37·남)씨. 캠핑 의자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던 그를 살짝 깨웠다. “연차 휴가를 내고 밤 12시부터 앉아 있었어요. 와이프 핸드백(클래식 플랩백 스몰)하고 지갑 사려고요. 오늘 물건만 풀린다면 1200만원 정도 쓸 계획입니다. 3년 전 해외 여행 갔을 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놓쳤어요. 그 사이 가방 값은 2배 가까이 뛰었고요.” 지금 심정이 어떻냐는 질문에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2등은 충북에서 온 동갑내기 신혼 부부(28)였다. 이들은 캠핑 의자에 나란히 앉아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젊은 부부는 혹시 지금 상황을 일종의 ‘쇼핑 놀이’나 ‘체험’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전혀요. 놀이가 아니라 희생이죠. 자정에 출발해 새벽 2시30분쯤 도착했어요. 600만~700만원대 가방(코코 핸들)을 노리고 있죠. 어떤 매장에 물건이 풀린다는 정보가 전혀 없으니 몸이 고생하네요.”

◇“미쳤다고 손가락질하던 내가…”

오전 6시를 넘어서자, 노숙 행렬이 긴 줄을 이뤘다. 샤넬·루이비통·몽클레어 같은 명품 옷을 걸친 이들이 많았다. 돗자리·담요·베개까지 준비해 온 ‘고수(高手)’도 여럿.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이모(33·여)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씨는 “2년 전부터 셀 수도 없이 ‘오픈런’을 해왔다”며 “오늘은 잠이 안와 ‘나를 위한 성탄 선물’을 구하려고 나왔다”고 했다.

“어느 날 백화점 개장 시간에 맞춰 왔더니, 어딘가 숨어있던 사람들이 수십명 쏟아지더라고요. 주말이면 텐트까지 들어서고요. 웃돈을 붙여 되파는 ‘리셀(resell)업자’에게 구하긴 싫어서, 저도 뛰어들었죠.”

12월 23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오픈런 현장. /한경진 기자

이씨는 “포털 명품 카페에서 몇개월치 샤넬 구매 인증 글을 전수(全數) 조사해 어느 점포·어떤 요일에 가방이 깔리는지 ‘유통 패턴’을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샤넬 백은 무조건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일단 사두면 손해보는 일이 없어요. 중고나라에 올리면, 판매 글 올린 지 하루 이틀 안에 다 팔려요.”

12월 23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오픈런을 기다리는 사람들. /한경진 기자

오전 9시50분, 대기 인원이 50여명으로 늘어났다. 대기자 연령은 20~40대. 여성 소비자가 대부분일 거란 예상과 달리, 남성 고객 비율도 40% 이상이었다. 경기도 부천에서 성탄 선물용 지갑을 사러 왔다는 자영업자 최모(42·남)씨는 “예전에 ‘오픈런’ 뉴스를 봤을 땐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욕했었다”며 “그랬던 내가 새벽에 나와 줄을 서고 있자니, 창피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든다”고 했다.

◇13분 만에 대기 인원 100명

오전 10시, 샤넬 직원들이 나와 태블릿 PC로 대기 예약을 받기 시작했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배경 음악인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이 울려퍼졌다. 철제 셔터가 서서히 올라갔다. 샤넬 예약에 성공한 사람들은 잽싸게 몸을 구긴 뒤, 셔터 밑을 기어 에르메스 매장으로 달렸다. 오전 10시43분, 샤넬 매장 대기인원이 100명을 돌파했다. 개장 13분 만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꿈에 그리던 샤넬을 손에 넣었을까? 오전 10시45분 매장 안. 함께 밤을 지샌 전우(戰友)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인기 핸드백 제품은 단 한개도 보이지 않았다. 실용성이 떨어지는 하얀 가죽 제품이나, 비인기 디자인 일색이었다. 매장 직원은 “성탄 시즌이라 물건이 많이 빠진 상태”며 “보시다시피 매장에 클래식 모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12월 23일 서울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샤넬 매장에선 개장 13분 만에 대기인원이 100명을 넘어섰다. /한경진 기자

한파를 뚫고 노숙까지 불사하며 매장 정복에 성공했지만, 애초부터 이 산(山)이 아니었다. 대기업 직원 이씨는 “이렇게 밤샘 고생을 해도 허탕을 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발길을 돌렸다. 명품 줄서기 대행 업체를 운영하는 김태균(31)씨는 “일반 소비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전문 리셀러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며 “6개월 전 줄서기 업체를 차렸는데, 지금은 4~5곳이 성업 중”이라고했다. 크리스마스가 눈 앞이었지만, ‘샤넬 산타’는 오지 않았다.

오픈런 현상은 작년 여름부터 확산했다. 사진은 지난 10월에도 백화점 개장 3분만에 샤넬 매장에 대기줄이 생긴 모습. /한경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