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5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셔터를 내린 인쇄 가게들 사이로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을 내건 곱도리탕 식당 ‘골목집’이 나타났다. 레트로한 외관으로 노포(老鋪) 흉내를 냈는데, 안은 젊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입구에선 20대 커플 다섯 쌍이 차례를 기다리며 매장 안을 기웃거렸다. 골목을 따라 늘어선 ‘을지 장만옥’ ‘코너숍’ ‘토리카미’ 등 다른 식당들도 붐비는 건 마찬가지. 을지로가 멋지다는 뜻의 ‘힙(hip)하다’와 합쳐져 ‘힙지로’로 불리게 된 까닭은 이처럼 힙한 식당, 카페, 주점들이 모여 새로운 상권을 탄생시킨 데 있다. ‘F&B(Food&Beverage·식음료) 매장’이 낡은 을지로 인쇄 골목을 핫플레이스로 바꾼 것이다.
# 8월 11일부터 17일, 오후 2시부터 오전 0시까지 진행된 대전 '0시 축제'. 14년 만에 다시 열린 이 축제를 즐기러 온 인파가 몰린 지역 중 하나가 명물 빵집 '성심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심당 거리'였다. 본점 반경 200m 안으로 빙수 가게 '성심당 옛맛솜씨', 케이크 가게 '성심당 케익부띠끄', 복합문화공간 '성심당 문화원'이 있다. 평소에도 '빵지순례(빵+성지순례)'를 온 관광객에겐 필수 코스다. 성심당이란 F&B 브랜드 하나가 상권을 만들자, 까다로운 입지 선정으로 유명한 스타벅스는 이 상권에 매장을 두 곳이나 냈다. 성심당 인근 임대료는 최근 5년 사이 30% 오르면서 3.3㎡(1평)당 1억원에 거래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 명품 브랜드 구찌는 지난해 3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 레스토랑 '구찌 오스테리아'를 선보였다. 핫플레이스의 트리거(방아쇠)가 F&B라는 것을 102년 역사의 명품 브랜드도 인정한 셈이다. 실제로 구찌는 식당 오픈 전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받았는데, 신청자가 몰리면서 2개월치 주요 시간대 예약이 20분 만에 마감됐다. 구찌 오스테리아는 오픈한 지 1년이 넘은 지금도 인스타그램에 '맛집' '핫플레이스' '구찌 레스토랑'과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인증샷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젊은 층의 기호에 맞춘 맛집과 카페로 대표되는 F&B 매장이 핫플레이스의 필수 조건으로 주목받고 있다. 올해 코로나19가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으로 전환하면서 오프라인 상권을 찾는 발길이 늘고 있는데, F&B가 이들을 끌어모으는 일등 공신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새로운 소비 주역으로 부상한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는 인기 F&B 매장이라면 개점 시간을 기다려 줄을 서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집객(集客)에 사활을 거는 백화점들이 인기 F&B 브랜드 입점에 공을 들이고 지역 상권 살리기에 몰두하는 지자체들이 F&B 매장 육성에 힘쓰는 이유다. 코로나19에 직격탄을 맞았던 외식산업은 세계시장이 2028년 4조4300억달러(약 5경8767조7000억원)로 2021년(2조5200억달러) 대비 75.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될 만큼 갈수록 덩치를 키우는 데 머물지 않고, 인근 상권을 살리는 외부 효과까지 키우고 있다.
‘集客 효과’ 확실…백화점도 공들이는 F&B
올해 1월 서울시가 발표한 ‘2022 상가 임대차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주요 상권의 전체 업종에서 F&B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매장수 기준)은 57.7%에 달했다. 앞서 2019년 조사에서는 54%였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여파에도 3년 사이 3%포인트 이상 상승한 셈이다. 주요 상권의 핵심은 단연 먹고 마실 거리임을 보여준다. 2022년 기준 F&B 업종 비율이 가장 높은 상권은 명동 거리로, 84.2%에 달했다. 흔히 명동은 ‘쇼핑의 메카’로 알려져 있지만, 패션·의류 판매 업종은 상권의 6.6%에 불과했다. 식료품·의약품 판매 업종도 3.9%에 그쳤다. 사실 명동의 심장은 F&B였던 것이다.
해외에서도 F&B는 주요 상권을 만드는 핵심 요소다. 일례로,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인타운이 있다. 국내 프랜차이즈 ‘BBQ 치킨’부터 ‘북창동 순두부’, 지난해 미쉐린 원스타를 받은 김지호 셰프의 ’주막반점’ 등이 이곳에 모여있다. 서울 서교동 유명 돼지국밥집 ‘옥동식’은 본점에 이은 후속 매장을 아예 뉴욕 한인타운에 열었다. 덕분에 한인타운은 최근 뉴욕을 찾은 해외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상권은 매출이다’의 저자 송규봉 GIS유나이티드 대표는 “한인타운 사례처럼 해외에서도 주요 상권을 뒷받침하는 것은 단연 F&B 매장”이라고 강조했다.
‘유통 공룡’ 백화점도 F&B 매장 강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집객 효과가 확실하고, 자연스레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8월 5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 문을 연 ’런던베이글뮤지엄’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고객 수백 명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명품 브랜드 매장 앞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픈런이다.
앞서 올해 3월 이곳에 매장을 연 F&B 기업 GFFG의 도넛 전문점 ‘노티드 월드’는 매일 3000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평균 대기 시간은 1시간이다. 덕분에 롯데백화점의 올해 1~7월 F&B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F&B 업체가 먼저 백화점에 ‘입점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면, 이제는 거꾸로 백화점이 먼저 유명 F&B에 ‘제발 입점해달라’고 요청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지역 소멸 위기 대안 F&B
F&B는 지역 소멸 위기의 대안으로도 꼽힌다. 충남 예산군의 예산시장이 대표적이다. 하루 방문객이 100명도 안 됐던 예산시장은 F&B 기업 더본코리아의 도움으로 지금은 지역을 대표하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파기름 비빔국수, 마라 칼국수, 닭볶음 등 기존에 없던 메뉴를 개발해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예산시장이 재단장을 마친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다녀간 인원만 137만 명이다. 덕분에 인근 관광지와 예산군 내 다른 상권까지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다.
서울 제기동의 전통시장 경동시장은 스타벅스 덕분에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의 필수 코스가 됐다. 지난해 12월 시장 내 폐극장이었던 경동극장을 개조해 ‘스타벅스 경동1960점’을 오픈한 것이다. 전통시장에 관심 없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시장을 찾기 시작했고, 스타벅스가 문을 연 뒤 2주 동안 누적 방문자가 2만 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시장 내 자리한 청년몰 식당의 매출은 두 배까지 늘었다. 대기업이 전통시장을 죽인다는 오랜 상식이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F&B 효과다.
“상권 인기 유지하려면 ‘플러스알파’ 필요”
F&B가 핫플레이스로 거듭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인기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준범 GFFG 대표는 “이제 사람들은 단순히 맛만 따지지 않는다”며 “인형, 달력, 가방 장식 등 굿즈를 같이 파는 게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팬덤이 형성되고, 더 많은 사람이 매장을 찾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기존 거주자 또는 임차인이 내몰리는 현상)도 경계해야 한다.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지역 성장을 주도적으로 이끈 F&B 업체들이 되레 밀려날 수 있다. 변준호 더본코리아 지역개발사업팀 부장은 “임대료 안정을 법제화한 서울 성동구의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조례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