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거리며 베트남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게 취미입니다. <두 얼굴의 베트남-뜻밖의 기회와 낯선 위험의 비즈니스>라는 책도 썼지요. 우리에게 ‘사이공’으로 익숙한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소음을 들으며 맞는 아침을 좋아했습니다. ‘사이공 모닝’을 통해 제가 좋아하던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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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1908년 한 여성이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지자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날이지요. 이때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쳤습니다. 빵은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의 생존권, 장미는 제한돼 있던 참정권을 뜻하는 거였죠.

여성의 날이 크게 와 닿지 않는 우리나라와 달리 베트남에서는 여성의 날을 모르고 지나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과 10월 20일 베트남 여성의 날이 다가오면 온 동네가 꽃밭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선 냄새, 과일 냄새가 뒤섞여 나던 대형 마트에서 꽃 향기가 물씬 풍기고, 화장품 가게와 온라인 쇼핑몰 등은 여성의 날을 기념한 할인 프로모션에 돌입합니다.

베트남 호찌민의 한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꽃들. 1년에 두번 있는 여성의 날엔 대형마트가 꽃밭으로 변한다. /호찌민=이미지 기자

왜 이렇게 난리냐고요? 남편들이 이날 꽃을 잊은 채 귀가한다면 말 그대로 쫓겨날지 모릅니다. 남자 친구 역시 마찬가지이죠. 정부와 기업들까지 여성의 날을 기념해 선물을 증정하거나 축하 행사를 엽니다. 베트남 전체 경제활동 인구 중 여성의 비율은 46.8%. 베트남에서는 애 키우고 살림하며 돈도 버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큰 편이지요. 잔소리 듣기 싫으면 여성의 날에 꽃과 선물은 필수입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고향의 추억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문화는 남아있습니다. 앞선 뉴스레터에서 베트남도 우리나라의 설 명절처럼 뗏(tết) 명절을 쇤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이번 설 명절에 베트남 친구의 고향집에 갔다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풍경을 목격했습니다.

돌아가신 조부모님 제단 앞에 차린 풍성한 차례상, 온 동네 친척들이 모인 시끌벅적한 풍경. 제게도 익숙한 풍경이었는데요, 차례를 끝내고 다 같이 밥을 먹기 시작하자 제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어? 이거 어릴 때 봤던 풍경인데?”

베트남의 한 지방에서 해당 집안의 어른인 큰 아버지가 조상의 위패 앞에 차려진 차례상을 두고 절을 하고 있다. /롱깐=이미지 기자

상은 두 군데에 차려졌습니다. 조부모님 위패 앞에 차려진 큰 상과 작은 상, 이렇게 두 개였지요. 큰 상에는 남자 어르신들과 손자들이 앉았고, 작은 상에는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빈 접시에 계속 음식을 채워 넣는 것 역시 큰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고모들이었지요. 아직도 그런 집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예전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밥을 먹기 전 옷을 갖춰 입고 대표로 절을 하고, 축원을 하는 사람이 큰아버지인 것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작은 상에 앉아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제 앞 접시는 빌 새가 없이 음식으로 가득 찼지요. 할머니 집에 간 손자처럼, 먹을 것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남자들이 앉은 큰 상에서는 맥주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외국에서 온 친구는 특별히 큰 상으로 자리를 옮겨 친척들과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서울내기로 이렇게 많은 친척과 명절을 보내본 적은 없지만 우리네 시골 어딘가에서도 같은 장면이 재현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더군요.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먹은 작은 상. 따로 먹긴 하지만 누가 앉는지와 상관없이 다양하고 풍족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서로 나눠 먹었다. 한국과 참 비슷하다. /롱깐=이미지 기자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처럼 큰아버지 댁이 아니라 조부모님을 모셔둔 사당(祠堂)에 모이고, 이곳을 동네 친척들이 다 같이 치우고 관리한다는 점이었을까요? 따로 위패를 모실 사당이 없는 경우 큰아버지 댁에 모일 테니 이 역시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한국보다 베트남 순위가 높다고?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있는 한국과 베트남이지만 여성 인권 순위는 베트남이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은 72위로 한국(105위)보다 33계단이나 위에 있거든요. 성 격차는 경제 참여·기회, 교육 수준, 건강, 정치 권한 등 4가지 항목에서 남녀평등 정도를 평가해 지수화한 것입니다.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한국의 순위가 베트남뿐 아니라 아프리카 세네갈(104위), 르완다(12위)보다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여성의 인권이 베트남 혹은 세네갈 여성보다 못하다고?”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죠.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여성노동연대회의 등 여성·사회단체 회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광장에서 세계 여성의 날을 나흘 앞두고 성평등사회 조성을 촉구하며 유리천장 깨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3.3.4/뉴스1

사실 각 국가별 ‘여성’의 인권만 비교한다면 한국이 압도적으로 우수할 거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해당 국가의 남성-여성 간 성별 격차를 따진 수치. 전체적인 국가 인권 수준은 한국이 더 높을지 몰라도 같은 사회를 사는 남녀 간 격차는 한국이 더 크다는 걸로 해석을 해야겠지요.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이 매년 꼴등을 하는 것도 이런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범정부적 목표여야 할 평등

베트남은 1945년 독립 선언 이후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국가 정책으로 내세웠고, 1946년 제정한 헌법에서 양성 평등을 규정한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남녀 평등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게 남녀 간 평등 부문에서 한국보다 33계단이나 높은 나라를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여성들도 “여성의 날에 꽃과 선물로 축하받는 게 부럽다”고 말하면 “여성의 날이 아닌 모든 날은 다 남성들의 날이잖아”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가부장적 문화와 차별이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전통 의복인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 /호찌민=이미지 기자

남녀평등은 여성들에게 잘해달라는 단순한 투정이 아닙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날수록, 남녀 불평등이 심화할수록 저출산 같은 문제가 심각해지고, 국가 존립이 위태로워지거든요. 이미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베트남 역시 작년 합계 출산율이 1.91명으로 동남아 최하위권에 속하면서 범정부적인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요.

오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 한국, 베트남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여성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남녀가 서로 갈등과 혐오로 생채기 내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만 이날만큼은 엄마나 여동생, 여자 친구에게 장미꽃 한 송이 건네보시면 어떨까요?


6년 전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거리며 베트남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 게 취미입니다. <두 얼굴의 베트남-뜻밖의 기회와 낯선 위험의 비즈니스>라는 책도 썼지요. 우리에게 ‘사이공’으로 익숙한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소음을 들으며 맞는 아침을 좋아했습니다. ‘사이공 모닝’을 통해 제가 좋아하던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려 합니다.사이공 모닝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