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커피 전문점 할리스는 지난 6일 일본 오사카의 중심 상권인 ‘혼마치’에 매장을 오픈했다. 작년 5월 오사카 난바에 처음 문을 연 뒤 2호점이다. 혼마치 매장에는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로 된 ‘할리스’ 간판이 달렸다. 벽면에는 ‘프리미엄 K(한국) 카페’라는 문구도 새겼다.
역사가 긴 브랜드가 많고, 자국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해외 브랜드의 무덤’으로 불렸던 일본에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진출하고 있다. 20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쿠팡, 배달의민족, 교촌치킨 등 한국 기업이 일본에 진출했다가 철수하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은 최근 일본을 기회의 땅으로 보고 있다. K뷰티(화장품)를 시작으로 일본에서 한국 브랜드 호감도가 높아지고, 특히 한국 여행, K팝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일본의 10, 20대가 한국 기업의 일본행을 재촉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은 화장품 브랜드뿐 아니라 패션, 먹거리에 더해 일상에서 두루 쓰이는 중고거래, 배달 플랫폼까지 확장되고 있다.
◇K뷰티, 한류 소비층 1020으로 바꿔
일본에서 국내 브랜드 진출의 포문을 다시 연 것은 K뷰티였다. 한국 화장품은 일본이 수입하는 외국 화장품 중 3년 연속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일본 10대,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소문을 타기 시작해 블랙핑크, 아이브 등 일본에서 인기 있는 한국 아이돌을 모델로 앞세워 돈키호테, 로프트(loft) 등 오프라인 매장까지 장악하고 있다. 작년 7월 이베이재팬이 운영하는 이커머스 업체 큐텐재팬이 오프라인 뷰티 행사 ‘메가 코스메 랜드 2024’를 열었는데, 부스 30곳 중 29곳이 K뷰티 부스였고 주말 동안 2만명이 몰리며 입장권이 매진됐다. 방문객 대부분이 10~30대 여성이었다.
K뷰티 인기에 힘입어 한국의 대일(對日) 화장품 수출액은 지난해 처음으로 10억달러를 넘어섰다. 일본 이커머스 시장에서 K뷰티 점유율 1위인 큐텐재팬은 지난 14일 화장품 ODM 1위 기업 코스맥스와 손잡고 1000억엔(9800억원) 규모 K뷰티 20사, 100억엔(980억원) 규모의 K뷰티 100사 육성 계획을 밝혔다. 이날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한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은 “고객사의 일본 진출을 위한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K뷰티의 일본 공략은 일본 내 한류 흐름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중장년층 여성들이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에 호감을 갖고 있던 것에서 나아가 한류의 주 소비층을 10, 20대로 바꿔놓은 것이다. 일본 MZ세대는 한국의 패션과 음식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한국에 놀러 왔다가 돌아간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졌다.
◇중고 거래·배달 앱도 일본으로
버거·치킨 브랜드 맘스터치는 39년간 맥도널드가 영업했던 도쿄 시부야에 직영 1호점을 냈고, 하라주쿠에 2호점 오픈을 앞두고 있다. 맘스터치는 올해 내에 일본 매장을 3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먹거리 매장도 달라지는 모양새다. 감자탕, 김치찌개 등 전형적인 한국 음식에서 나아가 일본 자체 브랜드와 글로벌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는 버거, 치킨, 커피 등에도 한국 브랜드들이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유통 업계 관계자는 “과거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영업했던 한국 브랜드들이 일본 핵심 상권에 깃발을 꽂고 있다”고 말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에 진출한 우리나라 외식 브랜드는 2023년 21개에서 30개로 1년 새 43% 늘었고, 매장 수는 133개에서 161개로 21% 증가했다.
“日서 주류는 아니지만 분위기 달라진 건 분명"
일본에 진출하는 국내 기업들의 면면이 다양해지면서 ‘일본 진출 2.0 시대’라는 말까지 나온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해외 고객을 겨냥한 모바일 앱과 팝업 스토어 등 ‘글로벌 스토어’로 지난해 출시 2년 만에 흑자를 냈는데, 매출 절반 가까이가 일본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도 2023년 말 일본 서비스 ‘아무드(amood)’를 출시해 한국 플랫폼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쇼핑 앱 다운로드 순위 5위권에 올랐다.
배달, 온라인 중고 거래 등 생활 서비스 플랫폼들도 일본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IT를 기반으로 국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실력을 키운 업체들이 한국식 편의 서비스를 내세워 일본 젊은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전략이다. 플랫폼이 성공하기 위해선 대규모 회원을 유입시켜야 하는 등 과제가 적지 않지만, 도전에 나서는 기업들이 잇따르고 있다. 쿠팡이츠는 올해 초 도쿄 미나토 지역에서 음식 배달 시범 서비스 ‘로켓나우’를 시작했고, 중고 거래 앱 ‘당근’은 작년 도쿄와 가와사키, 요코하마 전역으로 서비스를 확대했다. 또 다른 중고 앱 번개장터는 작년 6월 일본 중고 거래 플랫폼과 협업해 양국 간 중고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다. 공예품 플랫폼 ‘아이디어스’도 이달부터 글로벌 앱에 일본어 서비스와 엔화 결제 서비스를 출시하며 일본에 본격 진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