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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글로벌 대표 가치주 ETF(상장지수펀드)와 성장주 ETF가 각각 받아 든 성적표다. 최근 국내외 증시에는 ‘가치 투자의 시대는 끝났다’는 회의론이 퍼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기술주가 연일 신고점을 갈아치우는 동안에도 지지부진한 가치주 실적에, 투자자들이 하나 둘 등을 돌리는 것이다.
지난 100년 간 ‘투자의 정도(正道)’로 여겨진 가치 투자, 이제는 정말 유효하지 않은 전략이 됐을까? 가치 투자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보고 한국에 설파해 온 1세대 가치 투자자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에게 Mint가 지난 12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1998년 국내 첫 가치 투자 펀드 ‘동원밸류 이채원 펀드’를 출시한 한국 가치 투자자의 대명사다. 이 대표는 “지금이 어쩌면 100년에 한 번 오는 가치 투자의 기회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발언을 최대한 살려 싣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가치투자자의 입장에서 ‘가치투자 시대는 끝났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시장에 오해가 있다. 가치주와 성장주의 개념이 지나치게 표준화되어 굳어졌다. 사실 가치 투자란 모멘텀 투자에 반대되는 투자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모멘텀 투자는 앞으로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예측·전망에 근거해 투자한다. 시장의 분위기, 투자 타이밍에 민감하다. 특정 테마주 투자 같은 것도 모멘텀 투자의 일종이다. 반면 가치 투자는 시장·경기 상황과 무관하게 기업의 내재 가치에 집중해 투자하는 것이다. 실제 기업의 가격과 내재 가치 사이의 괴리(차이)를 추구하는 게 가치 투자의 기본이다. 같은 셀트리온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가치 투자가 될 수도, 모멘텀 투자가 될 수도 있다. 1만원일 때 셀트리온의 기업 가치가 이보다 높다고 알아보고 투자해 장기 보유했다면 가치 투자, 30만원을 넘어서며 상승할 때 추격매수를 시도한다면 모멘텀 투자가 되는 식이다.
가치주와 성장주에 대한 고정관념도 큰 것 같다. 하지만 가치주와 성장주는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삼성전자만 해도 MSCI성장주 지수와 MSCI 가치주 지수에 동시에 들어가 있다. 사람들이 ‘부진하다’ ‘죽었다’고 평가할 때 생각하는 ‘가치 투자’라는 개념이 실제 가치 투자와 다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성장주 투자도 실제론 ‘앞으로 기업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바탕에 깔린 만큼, 사실 어느 정도 가치 투자의 성격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가치주’와 ‘성장주’에 투자하는 ETF 상품 수익률에 큰 차이가 있다. 유명 가치투자자들의 실적도 신통치 않다.
"흔히들 생각하는 ‘가치주’와 ‘성장주’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가치 투자의 시대가 끝났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노(no)다. 환경에 따라 순환주기(사이클)이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가치주는 한 번 반등하기 시작하면 폭등하진 않지만 10여년 꾸준히 오른다. 반면 성장주는 짧은 시간 폭발적으로 10배, 20배 올랐다가 오랜 기간 숨을 고른다. 이 같은 가치주-성장주 패턴이 수십년 간 반복돼왔다.
실제 1990년대 미국 ‘닷컴 버블’ 당시에도 가치 투자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성장주에 비해 실적이 나빴다. 하지만 닷컴 버블이 붕괴된 이후부턴 가치주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2000년부터 2013년까지 가치주는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500 등 시장 지수보다 좋은 성적을 꾸준히 냈다. 이후 가치주가 다시 침체하고, 성장주가 강세를 보이는 시기에 접어든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5~6년 지속된 저성장·저금리의 영향이 크다. 가치 투자를 둘러싼 환경은 한국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10년 간 성장주는 시장 평균을 뛰어넘는 성적을 냈고, 가치주는 평균에 못 미쳤다. 미국보다 변동성은 덜하지만 한국 최근 몇 년간 저금리 기조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의 특성도 가치주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 기업 다수가 대외의존도가 높아 경기에 민감하고, 주주 환원율도 낮다. 이 때문에 기업 가치가 늘 평가절하(디스카운트)되는 경향이 있다."
가치주는 그럼 언제 반등할까?
"성장주와 가치주의 상승 주기가 언제 바뀔지는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성장주와 가치주의 밸류에이션 차이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이다. 성장주·가치주로 분류되는 기업 사이의 주가수익비율(PER) 차이도 극심하고, 성장주 기업의 매출·시가총액의 괴리도 크다. 이런 괴리는 결국은 좁혀질 가능성이 높다.
언제라고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성장주 상승세는 지금이 정점이라는 생각은 든다. 최근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조금씩 오르고 있다. 내년에 미국 경기부양책이 본격화되어 효과를 거두면 금리는 더 인상될 수 있다. 통상적으로 금리가 오르면 성장주보다 가치주에 유리하다. 미래가치를 현재 가치로 변환하는 할인율을 높이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른다면 그땐 다시 가치주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다. 국내 기업의 경우 최근 삼성전자·현대차와 같은 대기업이 선도적으로 주주 환원율을 개선하고 있다. 개미 투자자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는 추세다. 이런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면 국내 가치주도 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가치주를 선별하는 기준은 뭔가?
"사실 가치주의 정의나 가치주를 선별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한다. 기업의 내재 가치를 추산하는 수단이 계속 진화하기 때문이다. ‘가치 투자’의 개념을 만들어낸 벤저민 그레이엄 시절에는 숫자를 주로 봤다. 현금이 많고, 땅 같은 자산이 많고, PBR은 낮은 회사의 주식이 가치주로 분류됐다. 버핏은 여기에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시장지배력(프랜차이즈 밸류·franchise value) 같은 질적인 요소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요즘은 기업이 업계에서 ‘플랫폼’ 역할을 하느냐 아니냐가 가치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다만 아마존과 같은 기업은 충분히 높은 가치를 지닌 좋은 기업이다. 하지만 좋은 기업이 항상 좋은 주식인 건 아니다. 아마존은 가격이 이미 너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지금 투자하는 게 좋은 가치 투자라곤 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유명 회사의 주식은 가치주이기 어렵다. 유명한 회사가 좋은 회사이기까지 하다면 가격이 오르기 마련이다. 도리어 남들이 잘 모르는 회사, 오해·편견 등으로 시장에서 외면 받는 회사, 현재 증시 상승 분위기에서 소외된 회사. 이런 회사 중에 PER이나 PBR이 아직 낮은 ‘가치주’가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이오·게임·배터리 같은 일부 성장주 테마에서 벗어나 있지만 매년 조금씩 성장하며 안정적인 매출을 거두는 업체를 눈여겨본다. 중소형 규모 회사는 거론하기 어렵지만 예컨데 KT&G의 경우 PER은 10배에 불과한데 배당수익률은 5%에 달한다. 전통적인 가치주 영역에 해당된다. 삼성전자도 PER이 13배 정도여서 아직은 낮은 편이다. 또 LG·SK 지주사 등도 대부분 기업 가치에 비해 주가는 저렴한 편이다. 건설, 의식주 관련 기업도 지금은 주식 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한 이런 기업들이 망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반대로 지금 성장 업종에 있는 기업이라고 해서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보장은 없다. 주가도 계속 오를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누가 살아남을 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오랜 기간에 걸쳐 따박따박 현금을 벌어 곳간을 두둑히 채워둔 기업 주식이 낫다고 본다. 성장주 투자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SK텔레콤은 닷컴 버블이 한창이던 2000년 한때 주가가 50만원을 넘었다. 지금은? 매출은 그때보다 8배 정도 늘었는데, 주가는 절반 수준에 그친다. 반토막이다. 닷컴 버블 당시 투자자들은 20년 후 SK텔레콤의 매출이 20~30배는 증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매출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잘 나가는 성장주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가치 투자의 시대는 꼭 다시 온다?
“그렇다. 도리어 지금이야 말로 가치 투자를 할 적기다. 아마 100년 만에 처음 오는 최고의 기회일 것이다. 성장주와 가치주 사이의 괴리가 지금만큼 벌어진 적은 이제껏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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