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동산 분양 업체 ‘아밸론’을 운영하는 오세영 대표는 폭주하는 투자 문의로 눈코 뜰 새가 없다. 문의가 집중되는 곳은 미국 뉴욕 지역. 오 대표는 “교외 단독 주택 시장, 부촌으로 꼽히는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 같은 곳의 집값이 들썩거리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미국의 집값(주택 중간값)은 2019년 대비 13% 올랐다. 투자 열기가 달아오르며 일부 신축 콘도 투자는 1인당 가격이 180만달러(약 20억원)에 달하는데도 접수를 시작한 지 2주 만에 20건이 가(假)계약됐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 주택 가격도 크게 오르는 추세”라며 “무역 제재 때문에 직접 투자가 어려워진 중국인들은 동남아를 거쳐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집값은 더 이상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 오세아니아 등 세계 곳곳에서 집값이 앙등(昻騰)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등에서 적게는 8%대에서 많게는 20% 가까이 집값이 뛰었다. 한국의 지난해 상승률 8.35%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각국이 펼친 초저금리 정책으로 유동성이 넘쳐나게 된 것이 공통적 이유로 지목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각국 부동산 시장의 사정을 보면 큰 집 선호, 수요 예측 실패, 임대차 정책의 부작용, 외국인 수요 증가 등 집값을 끌어올린 다양한 구조적 원인이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전혀 낯설지 않은 문제들이다.
◇미국·영국: ‘더 크고 좋은 집’ 열풍
신종 코로나 대유행은 더 넓고 좋은 집을 원하게 만들었다. 재택근무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급증하면서다. 미국은 이러한 ‘큰 집 욕구’가 집값을 끌어올린 한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 신용평가사 S&P의 부동산 가격 지수(케이스-실러 지수)를 보면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집값이 많이 오른 지역은 애리조나주 피닉스(14.4%), 워싱턴주 시애틀(13.6%),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13.0%) 등이다. 뉴욕 교외인 웨스트체스터와 페어필드 카운티도 지난 1년 새 주택 매매가 65% 늘어나며 집값이 급등했다. 모두 외곽에 큰 집들이 밀집한 ‘교외 주택 단지’가 발달한 도시들이다. S&P는 “신종 코로나가 잠재적 주택 구매자들을 (큰 집이 있는) 교외로 옮기도록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영국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주택담보대출 업체 핼리팩스는 “지난해 집중적으로 주택 가격이 오른 지역은 재택근무에 편리한 교외 단독주택 혹은 중대형 주택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영국의 단독주택 평균 가격은 48만6595파운드(약 7억6000만원)로 전년 대비 10% 이상 오른 반면, 주로 도심지에 있는 아파트 가격은 14만6717파운드로 3.02% 오르는 데 그쳤다. 결국 도심은 공동화하고, 근교의 집값과 인구가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자 미국과 영국에선 ‘도넛 효과’란 말까지 나왔다.
◇독일: 수요 예측 실패, 잘못된 대응
주택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 실패가 원인으로 지목되는 곳도 있다. 지난 10년 새 집값이 2배 이상으로 뛰어오른 독일이다. 도이치방크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9년 사이 독일의 7대 주요 도시 집값 상승률은 무려 118.4%였다. 지난 한 해에도 집값 상승률은 11.42%에 달했다.
독일은 월세 중심의 우수한 주거 복지 덕분에 집값이 안정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년 새 180만명에 이르는 동유럽과 남유럽인이 일자리를 찾아 독일로 이주해 오면서 기존 주택 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시작됐다. 먼저 대도시 월세가 급등했고, 월세 상승이 주택 매매 가격 상승으로 다시 이어졌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Handelsblatt)는 “독일은 (수요 급증으로 인한) 주택 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가 모두 우물쭈물하는 사이 주택 신규 공급을 위한 택지 개발과 건축 규제 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이는 집값과 월세 폭등으로 이어졌다.
잘못된 임대차 정책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독일은 전체 주거의 50%에 육박하는 임대 주택의 주거비(임대료)를 안정시키려 임대료 인상률을 제한하는 정책으로 대응했다. 베를린은 특히 2020년부터 임대료를 5년간 동결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 조치로 임대료는 하락했지만, 월세 공급이 반 토막 나면서 근교 도시 월세가 급등했고, 매매가 상승세는 멈추지 않았다.
◇뉴질랜드·캐나다: 외국인 주택 급증
뉴질랜드는 이민자로 인한 수요 증가에 규제로 인한 주택 공급 부족이 겹치며 집값 급등을 초래한 사례다. 이 나라에서 집을 신축하려면 1991년 제정된 ‘자원관리법’에 따라 지역 주민 동의, 환경영향평가, 지방 정부 승인 등 절차를 거쳐야 한다. 본래 무분별한 산업·택지 개발에서 뉴질랜드의 청정 환경을 보호하려 만들어졌지만, 신규 주택 공급을 어렵게 하는 허들이 됐다. 뉴질랜드 정부는 “자원관리법 때문에 10년 간 4만 가구의 주택 건설 계획이 무산됐다”고 보고 있다. 이민에 의한 주택 수요 증가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해 뉴질랜드의 주택 중간 가격은 19.3% 폭등, 74만9000달러(약 6억1000만원)에 달했다.
이민으로 인한 집값 상승은 캐나다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중국인들의 ‘묻지 마 부동산 투자’가 토론토 등 대도시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면서 집값 상승을 유발했다. 캐나다 정부는 뒤늦게 ‘외국인 전용 취득세’를 신설하며 집값 잡기에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집값 상승에 자극받은 내국인의 주택 수요가 급증, ‘패닉 바잉’에 가까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은행(BMO)은 “순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가 주택 수요를 끌어올린 건 맞지만, 근본적으로는 캐나다인들이 (전보다) 더 많은 돈을 주택 구입에 쓰고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 따라가는 한국 부동산 시장
큰 집 선호와 주택 수요 예측 실패, 임대차 정책의 부작용, 외국인 수요 증가 같은 집값 상승 원인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독일의 월세 상한제 실패는 한국 ‘임대차 3법' 문제를 연상시킨다. 전·월세 상한과 임대 계약 갱신 청구권을 골자로 한 이 법이 지난해 7월 말 시행되기 된 이후, 서울 지역 전세값은 8월 3일 첫 조사에서 주간 상승률 연간 신기록(0.17% 상승)을 썼다. 반(半)전세도 크게 늘어 실수요자 부담이 커졌다. “전세금 급등이 주택 가격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큰 집 선호 역시 한국에서 오래된 이슈다. ’32평형'으로 대표되는 중형 아파트가 사실상 도시형 주거의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은 소형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중대형 아파트 가격 상승세가 전체 주택 가격 상승세를 이끌고 있다.
심지어 외국인의 주택 구매 급증 현상도 나타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의 아파트·오피스텔 등 건축물 거래는 2만1048건으로, 전년 대비 18.5% 증가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중국인이 자국의 투기 규제를 피해 한국 부동산에 투자, 집값 상승에 일조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들은 신고만 하면 부동산을 살 수 있고, 내국인이 받는 엄격한 금융 규제와 전매 규제를 받지 않는다.
해외 부동산 시장의 여러 문제가 한국에서도 발견되는 셈이다. 한국 경제의 규모 확대와 투자의 글로벌화가 진행되며 선진국과 부동산 문제가 ‘동조화'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김진유 한국주택학회 부회장은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보니, 현 정책으론 (집값 상승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구조적 해결책 없으면 상승세 지속”
국내외 집값 상승세는 계속될까. 전문가들은 일단 ‘상승세 계속’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송인호 경제전략연구부장은 “(글로벌 집값 상승은) 각각 오를 만한 요인이 있어 오른 것이기 때문에 (유동성 증가로 유발된) ‘거품’ 현상과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각국 부동산 시장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집값이 꺾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가 국제 부동산·시장 분석가 13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전문가들은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의 집값이 올해와 내년 계속 상승할 것으로 예측했다. 저금리 지속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구매 수요가 쉽게 줄지 않을 것으로 봤다. 미국 부동산 정보 업체 질로(Zillow)도 “주택 구매 경쟁이나 가격 상승이 근시일 내에 유의미하게 누그러질 것 같지 않다”고 밝혔다. 국내 전문가들도 비슷한 의견이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도 “길게는 5년 정도까지도 집값 우상향 곡선이 이어질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하지만 신중론도 커지고 있다. 최근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 상승이 주식 가격을 끌어내렸듯, 경기 회복 기대감이 금리 상승과 유동성 감소로 이어지면 주택 시장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제니 슈에츠 연구원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에선 이미 주택 가격은 상승하는데 임대료는 내려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도 지난해 12월 주택 판매와 신규 문의, 가격 기대치가 모두 감소한 데 이어 1월 집값이 전월 대비 0.3% 하락하며 “집값이 오를 만큼 오른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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