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주 앨리스 대표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 로데오 역 인근 골목. 흰 토끼가 그려진 간판을 지나 기다란 굴 속을 통과하듯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무거운 문을 열면 원더랜드 같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바(bar) ‘앨리스’입니다.

그러나 이날 앨리스 내부 모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한쪽 벽면에 프리젠테이션 화면을 띄워놓고, 좌석도 한 방향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오늘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앨리스 신 메뉴 발표날입니다.

앨리스의 14명 바텐더는 미쉐린 스타 셰프, 주류 전문가, 해외 인플루언서 앞에서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한 새로운 칵테일을 내놨습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테킬라와 라임 첼로를 넣은 칵테일 ‘E=MC²’, 어릴 적 즐기던 테트리스를 본뜬 수제 과일 젤리를 럼에 넣은 ‘플루트리스’,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보르도 마티니’, 장독대 모양으로 만든 쌀 아이스크림에 소주를 넣어 만든 ‘오키 독’ 등입니다.

서양식 술집을 일컫는 ‘바(bar)’는 유행을 많이 타는 업종입니다. 2000년대만 해도 가장 힙한 곳이었으나, 2010년대 들어와 와인바 열풍에 밀렸고, 최근에는 싱글몰트 바에 밀렸습니다. 최근에야 다시 ‘K칵테일’ 열풍으로 조금씩 부활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압구정동’ 역시 칵테일과 함께 흥망성쇠의 평행세계를 같이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에는 가장 잘 나가는 동네였지만, 2010년에는 가로수길과 경리단길, 2020년 초에는 성수동에 밀렸다가 최근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바 앨리스’는 유행 주기가 가장 짧은 한국 압구정에서 1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압구정이 쇠퇴할 때도 앨리스에 젊은 손님은 끊긴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K칵테일’의 대표주자로 해외 유명 칵테일바에서 쉐이킹(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드는 것)을 하기도 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마흔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1>칵테일을 예술 작품으로

앨리스 신메뉴 설명회 /이혜운 기자

칵테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최애 칵테일이 하나쯤 있습니다. 집에서도 만들어 마실 수 정도입니다. 그러니 바에 가서 칵테일을 마신다는 건 술 맛을 본다기보다 공간과 분위기를 즐기러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가 동네 자리를 많이 타는 이유입니다.

앨리스에서 새로 개발한 칵테일 발표회 /이혜운 기자

그러나 앨리스는 2년에 한 번씩 바텐더들이 직접 개발한 칵테일을 작품 공개하듯 내놓습니다. 이 바텐더의 이 칵테일을 마시려면 이곳에 올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칵테일 주제는 ‘원더’, 14명의 바텐더들은 몇 개월에 걸쳐 백일장에서 시를 쓰듯 주제를 연구하고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아티스트로 태어난다”는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바텐더들은 창의성을 발휘했고 그 결과 14개의 개성 강한 칵테일들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W호텔 등에서 바텐더 경력을 쌓은 김용주 앨리스 대표는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할 당시 정해진 규율이 강해 트렌드에 맞게 칵테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며 “지금은 바텐더들이 자신의 창의성을 제한 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K칵테일로 월드 투어

앨리스의 장독대를 형상화한 오키독 메뉴

앨리스가 새 칵테일 메뉴를 만들 때 1개 이상은 꼭 한국적 특징이 나타나는 메뉴로 만들려고 합니다. 앨리스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앨리스는 오픈 첫해부터 영국 주류전문저널 ‘드링크 인터내셔널’이 매년 발표하는 ‘아시아 최고 바 톱 50’ 순위에 매번 선정되고 있습니다.

앨리스의 바텐더들은 이렇게 2년에 한 번씩 신메뉴 공개 행사를 가지고 나면 바 문을 닫고 월드투어에 나섭니다. 해외 유명 바에 가서 신메뉴를 선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새 앨범을 내고 월드 투어를 나서는 K팝 가수 같습니다. 올해도 싱가포르 ‘지거 앤 포니’, 홍콩의 바 ‘레오네’ 등을 방문해 K칵테일을 선보였습니다. 김 대표는 “한국도 이제는 바텐더를 여러 나라에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동안 많은 프로그램과 행사를 진행했다”며 “현지에 가면 고객들이 사인해달라고 할 정도로 K바텐더들이 인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반대로, 해외 유명 바텐더들이 앨리스를 찾기도 합니다. 일종의 ‘답방 행사’도 많습니다. 올해는 지난 22일부터 오는 25일까지는 ‘십 앤 바이트(Sip and Bite)’라고 아시아 최고의 바텐더들이 앨리스 청담에서 자신의 칵테일 작품을 선보이는 행사도 가집니다. 올해는 일본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바텐더 시모스케 타카다 등이 방문합니다. 굳이 해외를 나가지 않아도 최고의 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3>단순함과 깔끔함이 최고의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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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같은 업종이 오랫동안 인기를 지속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인테리어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테리어에 민감한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유럽 귀족 분위기의 클래식한 인테리어가 유행하다, 언제는 깔끔한 일본 젠 스타일이 유행하다, 최근에는 미국 브루클린이나 독일 베를린의 힙한 스타일로 유행이 바뀌었습니다. 그때마다 인테리어를 바꾸다가는 수익의 상당수가 공사비로만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앨리스의 인테리어는 ‘단순함과 깔끔함’이라는 시간 초월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대신 메뉴가 바뀔 때마다 메뉴판만 바뀝니다. 이 메뉴판도 재질은 두꺼운 종이. 메뉴판 단가는 1만5000원 정도입니다. 김용주 대표는 “가게에 들어갔을 때 메뉴판이 더러우면 청결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며 “우리는 메뉴판이 조금만 더러워져도 바꾼다. 대신 단가를 낮췄다”고 말했습니다.

앨리스 내부

앨리스의 이런 단순 앤 깔끔 인테리어는 20대 여성 고객이 앨리스를 자주 방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층을 잡는다는 것은 트렌드를 이끄는 층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김 대표는 “앨리스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며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소주만큼이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K바의 대표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먹고, 자고, 입고, 놀고! 지금 이 순간, 가장 힙한 곳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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