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가격은 경제 상황을 미리 반영해 움직이기 때문에 ‘닥터 코퍼(Dr. Copper·구리 박사)’라고 불린다. 올 들어 구리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찍는 등 치솟고 있다. 그런데 이는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의 경기 침체 우려와 반대되는 움직임이어서 시장에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31일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서 5월 구리 선물 가격은 파운드당 5.09달러로 올 들어 26% 상승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미국 구리 선물은 1분기 주요 원자재 중 최고 실적”이라며 “올해 가장 인기 있는 원자재는 구리”라고 전했다.
◇트럼프 관세 위협에 미국 기업 “구리 확보하라”
구리는 전기, 건설, 자동차 등 대부분 산업에 사용되는 금속으로 경제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 구리 수요가 느는 건 산업 활동이 활발하다는 뜻으로, 경제 호황 신호다. 구리 가격이 오르면 제조업이 살아나고 경제가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을 준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글로벌 무역 전쟁 격화 가능성에 따라 향후 12개월 내 미국 경기 침체 확률을 20%에서 35%로 대폭 상향 조정했는데 구리 가격 움직임은 이와 반대된다.
올 들어 구리 가격이 폭등한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관세 가능성 때문이다. 지난 2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구리 수입이 미국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라고 지시하며 관세 부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미국 제조업체들이 서둘러 구리를 수입해 비축에 나서면서 가격이 뛴다는 것이다. WSJ는 “이는 관세 위협만으로 (미국) 국내 제조업의 비용이 상승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
미국의 구리 수요가 늘자 글로벌 가격도 뛰고 있다.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머큐리아’는 “현재 미국으로 유입되는 구리는 약 50만t으로, 기존 월평균 수입량(약 7만t)의 7배에 달한다”며 “이로 인해 공급난이 심화되면 런던금속거래소(LME)의 거래 가격이 현재 t당 약 1만달러에서 1만2000달러 이상으로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중국이 경기 부양책을 펴고 유럽 경제가 군비 등 재정 확대로 회복 조짐을 보이는 것도 구리 가격 상승의 이유로 지목된다. WSJ는 “최근 수십 년간 중국의 현대화, 재생에너지 생산 증가, 데이터센터 건설 붐으로 소비가 증가했다”고 했다. 구리 생산업체인 글렌코어는 증가하는 수요를 맞추려면 2050년까지 전 세계 구리 공급량이 매년 약 100만t씩 증가해야 한다고 추정했다.
◇원자재 투자자들도 몰려
투자자들이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원자재에 투자하며 구리 가격이 올랐을 가능성도 있다. 원자재 투기 세력이 몰려왔을 수도 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가격 차는 투자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올 들어 지난달 28일까지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구리 선물 가격은 28% 올랐지만, 국제 기준 시세인 런던금속거래소의 구리 가격은 13% 상승했다. WSJ는 “전례 없는 가격 격차”라고 했다. 구리 투자 펀드 운영사인 스프롯은 “다른 나라로 수출될 뻔했던 구리가 이제 미국으로 재유입되어 프리미엄을 활용하고 차익을 얻으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가수요로 구리 가격이 오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 관세가 부과되면 가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BNP파리바는 지난달 28일 “구리 관세가 몇 달이 아닌 몇 주 안에 시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후부터 구리 가격의 상승 기세가 꺾였다”며 “단축된 일정으로 미국으로의 선적량을 늘릴 여지가 거의 없을 것이며, 미국 수요가 둔화됨에 따라 2분기 말까지 구리 가격이 t당 8500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닥터 코퍼’의 원래 의미로 구리 수요가 많다는 것 자체가 미국이 경기 침체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진영 대신증권 연구원은 “구리 가격이 비쌀 때 대체할 수 있는 원자재로 알루미늄을 든다. 통상 알루미늄 2.5t 가격이 구리의 0.9배에 근접할 경우 기업들의 대체 수요는 감소하게 돼 침체로 보는데, 지금은 0.75배 수준”이라며 “구리와 알루미늄 가격 차이를 봐서도 아직 침체를 논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