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오는 2030년까지 아파트 등 모든 유형의 부동산 공시가격을 시세의 90%까지 끌어올리는 계획안을 내놨다. 주택시장 안정을 빌미로 종부세·취득세 등을 대폭 올려 다(多)주택자 및 고가 주택 보유자를 압박해 온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율 대폭 인상이라는 카드까지 꺼낸 것이다.
부동산 공시가격은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건강보험료, 기초연금 등 60여종의 세금·준조세·부담금을 매기는 기준이 된다.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올리면 중저가 주택을 보유한 서민층까지 세금이 늘고, 고령의 연금 생활자나 기초연금수급자 등 취약 계층에까지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모(43)씨는 올해 7월과 9월에 걸쳐 재산세 287만원을 냈다. 2017년 137만원이던 재산세가 3년 만에 2배로 뛰었다. 1주택 보유자인 김씨는 “문재인 정부 들어 집값이 많이 올랐지만, 수중에 들어온 돈은 하나도 없는데 ‘세금 폭탄’만 맞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김씨가 내야 할 세금은 더 늘어난다.
국토교통부는 27일 국토연구원과 함께 공청회를 열고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안)’을 발표했다. 계획안은 부동산 공시가격을 시세의 80%·90%·100%로 올리는 세 가지 방안을 담았는데, 현실화율을 90%로 맞추는 방안으로 사실상 결정됐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오전 원내대책회의에서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은 2030년까지 시가의 90%까지 맞추는 내용”이라고 했다.
현실화율을 90%까지 올리는 시기는 부동산 유형과 시세에 따라 다르다. 아파트·빌라·다세대주택 같은 공동주택의 경우, 시세 15억원 이상은 2025년까지, 9억원 이상~15억원 미만은 2027년까지, 9억원 미만은 2030년까지 올린다. 시기상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주택의 공시가격이 올라 서민층에서도 상당한 조세 저항이 예상된다. 현재 6억원인 서울 노원구 중계동 ‘무지개아파트’ 전용 59㎡는 올해 재산세가 44만원인데, 현실화율이 90%가 되면 집값이 하나도 안 올라도 재산세 부담은 116만원으로 163% 급증한다.
서울에 아파트 한채만 있어도, 재산세·건보료 다 뛴다
정부가 부동산 공시가격을 시세의 90%까지 올리기로 하면서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 토지 등 부동산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증세’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다(多)주택자를 겨냥하던 정부가 이제는 1주택자까지 세금 폭탄의 과녁으로 삼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의 대표적인 중산층 단지인 마포구 ‘마포래미안푸르지오’ 전용면적 84㎡를 보유한 1주택자 A씨의 경우,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154만원의 보유세를 냈지만, 올해는 2배가 넘는 325만원을 부담했다. 아파트 값이 3년 새 9억원에서 16억원으로 급등해 보유세 과세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도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앞으로 집값이 전혀 안 올라도 A씨는 2025년엔 약 766만원의 보유세를 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시세 15억원 이상 아파트는 5년 뒤 공시가격 시세 반영률을 90%까지 끌어올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27일 공개된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안은 2030년까지 모든 유형의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시가의 90%까지 맞추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율은 토지 65.5%, 단독주택은 53.6%, 아파트·연립 등 공동주택은 69%다. 어떤 형태의 집이라도 한 채 갖고 있으면, 앞으로 내는 세금 부담이 급증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타깃’으로 삼는 15억원 이상 고가 주택 보유자와 다주택자는 단기간에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 부담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날 전망이다. 9억원 미만 주택에 대해서는 10년에 걸쳐 현실화율 속도를 늦추기로 했지만 결국 세금은 오를 수밖에 없어 ‘보편적 증세’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실화율 인상으로 종부세 대상이 되는 1주택자뿐 아니라 저가 1주택 소유자도 조세 부담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파트 ‘보유세 폭탄’ 터진다
공시가격을 시세의 90%까지 올리면 집값이 한 푼도 오르지 않아도 세금 부담은 저절로 늘어난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이 서울 주요 아파트 단지의 보유세 부담을 모의 계산한 결과, 현재 시세 30억원인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전용면적 84.97㎡)를 가진 1주택자는 올해 재산세와 종부세를 총 1326만원 내지만, 시세 반영률이 90%로 오르면 2643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집값이 매년 5%씩 오른다고 가정하면 2025년엔 4096만원까지 보유세가 나올 수 있다.
집값이 낮아도 현실화율 조정에 따른 세 부담 증가가 만만치 않다. 시세 6억원인 노원구 ‘중계 무지개아파트’(59.26㎡)는 올해 보유세가 44만원이었지만, 정부가 2030년 시세 반영률을 90%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116만원을 내야 한다. 다만 매년 보유세를 일정 비율 이상 올리지 못하게 돼 있어 실제 부담은 이보다는 낮을 수 있다.
◇집값 내렸는데 세금 더 낼 수도
정부는 9억원 미만 주택은 향후 3년간 급격한 공시가격 상승이 없도록 속도 조절을 할 방침이다. 문제는 서울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점이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집값 순서로 줄을 세웠을 때 한가운데 가격)은 6억600만원이었지만, 현재는 9억2000만원까지 올랐다. 이미 서울 아파트의 절반이 9억원을 넘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집값이 더 오르면 ‘속도 조절’ 혜택을 받는 주택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주택자는 그야말로 ‘세금 폭탄’을 피할 수 없다. 지난 8월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 통과로 3주택 이상 다주택자와 조정대상지역 2주택자 종부세율이 최대 6%까지 오르기 때문이다. 바뀐 종부세율은 내년 6월 1일 기준으로 적용된다. 양지영 R&C 연구소장은 “다주택자들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세금 압박을 받고 있어 내년 6월 전 ‘급매’로 집을 처분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선종 건국대 교수는 “고가 부동산에만 높은 현실화율을 적용하는 것은 조세 정의에 어긋난다”고 했다.
과도한 공시가격 인상으로 ‘시세 역전’ 부작용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한 시중은행 부동산 전문가는 “자칫 집값이 하락기에 접어들면, 공시가격이 실제 집값보다 높아져 세금을 더 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단독주택은 긴 호흡으로 현실화율 인상
정부는 현실화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단독주택과 토지의 공시가격 현실화율을 높여 공동주택과의 형평성을 맞추기로 했다. 단독주택의 경우 7~15년에 걸쳐 현실화율 90%에 도달하는 목표가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5~10년에 걸쳐 90%로 끌어올리는 공동주택과 비교하면 좀 더 긴 호흡으로 현실화율을 올린다는 계획이다. 9억원 미만 단독주택은 일정 기간 연 1%포인트 소폭 인상하다가 연 3%포인트로 인상률을 올리고, 15억원 이상 고가 단독주택은 연간 4.5%포인트 현실화율 인상을 목표로 잡았다. 토지(표준지)의 경우 연간 3%포인트씩 현실화율을 높여 2028년까지 90%로 끌어올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