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월세 32만원짜리 원룸에 살던 김모씨는 6월 말 월세를 28만원으로 낮추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월세를 내린 대신 8만원이던 관리비를 16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월세가 30만원을 넘으면 계약 내용을 신고해야 하는 전·월세 신고제를 피하려는 집주인의 ‘꼼수’였다. 사실상 월세 지출이 늘게 된 김씨는 항의했지만, 새 월셋집을 찾는 불편함과 이사 비용 등을 고려해 관리비를 15만원 내기로 하고 도장을 찍었다.
지난해 7월 말 시행된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 여파로 전국에서 ‘전세 대란’이 벌어졌다. 지난달 ‘임대차 3법’의 마지막 퍼즐인 전·월세 신고제까지 시행되면서 임대차 시장에서는 신고제를 피하려는 갖가지 편법이 성행하고 있다. 월세를 30만원 미만으로 낮추는 대신 관리비, 청소비 등 명목으로 ‘뒷돈’을 요구하는 집주인이 있는가 하면, 계약서에 실제 가격보다 낮은 금액을 쓰는 ‘다운 계약’을 요구하기도 한다. 임대 소득에 대한 과세를 세입자에게 전가하려는 집주인 때문에 원룸이나 소형 빌라에 사는 청년층, 서민들의 주거 부담이 가중되는 분위기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전·월세 신고제 역시 시장에 대한 과도한 규제”라며 “집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을 부추기고, 세입자 부담을 더 키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부터 시행된 전·월세 신고제는 월세 30만원 또는 보증금 6000만원 넘는 임대차 계약의 신고를 의무화하는 것이다. 임대차 시장을 투명하게 만들어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제도지만, 정부 기대와 달리 임대차 시장에선 “섣부른 정책 때문에 세입자의 주거비 부담만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세입자 부담 키우는 꼼수 성행
지난 5일 방문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원룸촌 주변 공인 중개업소에서는 월세에 비해 관리비가 과하게 비싸 보이는 매물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전용면적 16~19㎡짜리 원룸 관리비가 대부분 10만~15만원 선이었다. 월세 25만원에 관리비 20만원을 받겠다는 집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은 관리비는 임대차 신고 항목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국토교통부는 “집주인이 과다한 관리비를 요구하면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입자가 분쟁 조정을 신청해도 집주인이 응하지 않으면 뾰족한 방법이 없다. 법무법인 화우 홍정석 변호사는 “집주인이 건물 청소에 더 신경을 쓴다거나 인건비가 올랐다는 식으로 대응하면 세입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고제를 피하기 위해 계약서를 허위로 쓰자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강북의 한 공인 중개사는 “집주인이 실제 월세는 50만원을 받지만, 계약서는 29만원으로 쓰자고 하더라”며 “법적 책임 때문에 중개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비슷한 다운 계약이 심심찮게 이뤄진다고 들었다”고 했다.
임대인들은 “이번 정부 부동산 정책은 죄다 집주인은 무조건 나쁘고, 세금을 왕창 물리겠다는 식”이라고 항변한다. 은퇴한 지 15년이 넘었다는 한 임대인은 “재산세·건강보험료 등은 죄다 올려놓고, 비어 있는 방 한 칸에 월세 30만원 받아 생활비로 쓰는 것도 세금을 물리려 한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를 월세로 임대 중인 박모씨는 “전·월세 신고제 도입은 결국 과세 목적 아니냐”며 “다음에 새 세입자를 구할 땐 늘어난 세금을 더해 시세보다 비싸게 월세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 소멸' 이어 ‘월세 급등’ 부추기나
올 상반기 서울 아파트 전·월세 거래는 총 7만8724건으로 이 중 월세 거래는 2만6494건(33.6%)이다. 지난해 상반기 월세 비율(28.6%)보다 5%포인트 올랐다. 작년 7월 주택임대차법 개정 이후 집주인들이 전세를 꺼리게 됐고, 공시가격 인상에 따른 보유세 부담을 월세로 전가하는 경향 때문으로 해석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전국 주택 월세 가격은 0.83% 올랐다. 작년 같은 기간 상승률(0.12%)의 7배에 달한다. 올해 1분기 기준 월세 거주 가구가 지출하는 평균 주거비는 32만7703원으로 지난해 1분기(30만8469원)보다 6.2% 늘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주택 공급이 단기간에 늘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월세 규제를 무리하게 강행하면 취약 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