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하게 오른 집값에 대한 피로감, 금리 인상 여파에 따른 전국적인 집값 하락세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부동산 시장뿐만 아니라 실물 경기 위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통계지표상 서울 아파트 값 하락률이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치닫고,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직전 최고가 대비 ‘반 토막’ 난 거래도 등장했다. 탄탄한 수요 때문에 ‘불패(不敗) 시장’으로 통하던 서울 강남권에서도 실거래가가 30% 가까이 급락한 거래가 속출하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집값이 너무 가파르게 내리면 실물 경제가 타격을 입고, 관련 산업 생태계가 붕괴하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시장 기능이 정상 작동해 집값이 하향 안정되도록 정부가 ‘연착륙’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송도 신축 아파트 값, 6개월 새 반 토막
최근 수도권 부동산 시장에선 작년 최고가 대비 많게는 50% 가까이 집값이 떨어진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20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0년 7월 입주한 인천 송도 ‘더샵송도마리나베이’ 전용면적 84㎡가 8월 초 6억5000만원에 팔렸다. 올해 2월 계약된 같은 면적 최고가(12억4500만원)와 비교하면, 6개월 만에 절반 수준으로 내렸다. 인근의 ‘힐스테이트레이크송도’ ‘인천송도SK뷰’의 같은 면적은 지난달 7억2300만~7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11억원대였던 작년 말 실거래가보다 4억원 가까이 내린 것이다. 경기 화성시 ‘동탄역시범한화꿈에그린프레스티지’ 전용 84㎡도 최고가(14억5000만원) 대비 30% 넘게 내린 10억원에 지난달 거래됐다.
서울에선 송파구 잠실의 ‘대장주’로 꼽히는 ‘잠실엘스’ 전용 84㎡가 지난달 19억5000만원에 거래됐다. 작년 10월 최고가(27억원)보다 7억5000만원 낮다. 인근 공인중개사는 “가족끼리 증여성 거래가 아닌, 세금이나 빚 때문에 소유자가 급하게 처분해야 하는 매물이 거래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리센츠’ ‘트리지움’ 등 인근 대단지의 같은 면적 호가(呼價)도 20억원대 초반까지 떨어져 ‘잠실 30평대’ 아파트의 심리적 저항선으로 통하던 20억원이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대선 전후로 보유세 과세 기준일(6월 1일) 전까지 다주택자 매물이 쏟아지며 집값이 조정을 받다가 하반기엔 다시 회복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래 절벽은 더욱 심해지고, 집값 하락세에 계속 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8월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562건으로 역사상 최저 수준이다. 한국부동산원이 집계한 서울 아파트 값 변동률은 5월 -0.01%에서 6월 -0.08%로, 8월엔 -0.45%로 확대됐다. 집값 대세 하락기로 정부가 주택 경기 부양에 골치를 앓던 2013년 8월(-0.53%)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아파트 값이 가장 많이 떨어진 때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2월(-1.73%)이다.
◇집값 경착륙은 경제에 부담…”규제지역 풀어야”
전문가들은 “집값 급등도 문제이지만, 주택시장 경착륙 역시 만만찮은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한다. 김기원 데이터노우즈 대표는 “집값은 통화량 증가 속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전 정부 때 치솟은 국내 집값은 역대로 가장 심각한 ‘거품’일 수 있다”고 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추세적으로 집값 내림세가 더욱 가팔라져 올 연말엔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자산 가치가 급속도로 떨어지면, 주택 소유자들이 허리띠를 졸라 매고 내수(內需) 경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건설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 안팎에 달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도 영향을 받는다. 수익성 악화가 뻔한 상황에서 각종 주택 사업이 지연되면 ‘공급 확대를 통한 집값 안정’이라는 정부의 정책 목표도 타격을 입는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전문위원은 “서울 극소수 지역을 제외하고는 규제를 과감하게 풀고, 거래량이 회복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합수 건국대 교수는 “정상적인 거래까지 가로막는 과도한 대출규제와 수도권과 지방의 조정대상지역 해제를 시급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