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로(silo·위험 물질 저장고)보다 단단하게 차단된 전공(專攻) 간 장벽을 허물어야 과학기술의 미래가 열린다는 점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송호근 포스텍 석좌교수(인문사회학부)가 이달 말 사직을 앞두고 28일 본지에 “대학의 학과, 연구실이 담을 쌓고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일로 현상(부서 이기주의)’이 너무 심해 진정한 융합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2018년 “융합적 상상력을 갖춘 과학도를 양성하는 것이 내 마지막 임무”라며 서울대 교수직을 던지고 포스텍에 합류한 송 교수는 국내 대표 사회학자로 꼽힌다. 임기가 3년 넘게 남았지만 사직서를 내고 칩거 중이다. 포스텍에서는 송 교수 사직을 만류하는 호소문과 서명 운동 등이 교수들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다.

송 교수는 전화 인터뷰에서 “최근 2년간 명예훼손 피고소와 학내 인권센터 진정에 휘말리게 한 학교 측 행태도 영향을 줬지만, 사직을 결단한 이유는 지난 36년의 성공 역사에 취해 정체된 학교에 ‘깨어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송 교수는 같은 학교 비전임 교수가 ‘계약 없이 연구소 업무를 시켰다’며 문제 제기를 하자 교수진에 이메일을 보내 이를 비판했고, 이로 인해 해당 교수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이 사안은 최근 ‘혐의 없음’으로 불송치 결정이 났다.

송 교수는 “4년 전 부임 당시 과학의 눈만 있고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로 포스텍을 ‘외눈박이 코뿔소’에 비유했는데, 이제는 방향 감각마저 잃어 ‘드러누운 코뿔소’가 됐다”며 “구성원의 열정과 집단 지성이 한 곳으로 수렴되지 않아 활력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학과중심주의를 문제로 꼽았다. 2학년이 되면 학생들이 전공이라는 장벽에 막혀 융합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학생들이 전공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교류해야 하는데, 연구실·실험실에 틀어박혀 몰두하는 학교 분위기가 지나치다”며 “각자의 동굴 속에 사는 것과 다름없어 미래 비전에 관한 담론이 없다”고 했다.

그는 포스텍과 과학기술원(카이스트 등 4곳)이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선 특정 전공이 독점하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도록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컨대 인공지능이나 반도체 전공 등으로 지원이 몰릴 때 다른 전공 학생들도 활발히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고, 교육과정과 인적·물적 자원도 공유하는 통로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송 교수는 “연구비도 많고 인력도 몰리는 학과들은 남는 자원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며 “사일로처럼 굳어버린 칸막이를 허물어야 융합연구를 통한 유연한 아이디어가 더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송 교수는 또 포스텍과 4대 과기원의 글로벌 경쟁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대학평가를 통해 확인된 우리 대학들의 순위 하락은 산업 경쟁력과도 직결된 것이므로 심각하게 봐야 한다”며 “주변의 변화 속도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한 발짝이라도 겨우 나가는데, 대학들의 변화 속도가 더뎌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과학기술 연구에 중점을 둔 대학들의 사활은 뚜렷한 비전과 경쟁력 강화에 달려 있다”며 “21세기 문명 대변혁 시대엔 아이디어와 과학기술의 상업화가 성패를 좌우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