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 시각)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철수하기로 한 결정은 취임식 날 그가 서명한 여러 행정 명령 중 하나였다. /UPI 연합뉴스
사진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보건기구(WHO) 간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 역사적인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파리기후협약과 WHO에서 미국을 탈퇴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 예고한 대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탈퇴하는 절차에 돌입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최종 탈퇴까지는 최소 1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공중보건 전문가와 과학자들은 다음 팬데믹을 대비하는 국제 연대가 심각하게 흔들릴 것으로 우려한다. 미국에서 확산하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미국 보건의 새로운 시험무대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 백악관은 20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한 지 8시간 뒤 WHO에서 미국이 철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의 탈퇴 이유로 “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잘못된 대응을 하고 시급히 필요한 개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WHO가 중국에는 적은 비용만 부담하게 하고 미국에는 불공평하고 부담스러운 비용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WHO 탈퇴는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당선하면 WHO 탈퇴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20년 7월에도 WHO가 중국이 코로나19의 발원지임을 은폐하고 있다며 예산 지원 철회와 회원국 탈퇴를 추진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서 실제 탈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미, 예산 5분의 1 부담…WHO 타격 불가피

전문가들은 대체로 트럼프 대통령이 첫 임기 때 WHO에서 철수하려던 것은 코로나19 대응에서 자신의 실패를 덮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에 다시 WHO를 탈퇴하려는 것도 그 연장선에서 바라본다.

트럼프 대통령과 보수진영은 최근까지도 팬데믹과 백신 정책과 관련한 WHO의 운영 방식에 대해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일부 보수 진영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과도한 부담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미국은 WHO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22년과 2023년 WHO가 사용한 예산 68억달러(9조7600억원) 가운데 20%를 미국이 냈다.

WHO는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이 기구가 과도하게 각국 정책에 간섭하고 있다는 주장은 틀리며 자신들은 공중보건을 조정하는 기관일 뿐 강제 권한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 미국에 대해 과도한 예산을 부여한다는 주장에 대해 WHO의 예산으로 쓰이는 기여금은 자발적인 성격을 갖는다며 미국의 게이츠 재단이 미국 정부와 비슷한 수준의 금액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적지 않은 예산을 내는 미국이 탈퇴하면 WHO는 당장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WHO는 21일 성명을 통해 “미국의 탈퇴 발표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 정부가 재고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 명령이 자신을 강대국이라고 여기는 국가로서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미 의료계엔 부메랑…글로벌 보건 데이터 접근 어려워져

미국 주요 언론과 보건 정책 전문가들은 미국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탈퇴하면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더는 WHO가 제공하는 글로벌 보건 데이터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미국이 글로벌 보건 정보에 깜깜이가 되고 미국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주요 과학과 의학 정보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뜻이다.

WHO는 전 세계의 보건 당국자와 의사, 제약사들이 참고할 광범위한 건강과 복지 데이터를 매일 제공하고 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각종 질병 사망률과 약 제조 정보, 질병 유전체 정보 등을 받아 회원국들과 공유한다. 가자지구처럼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에 의료 상황을 수집하고 지카 바이러스와 에볼라, 코로나19처럼 급속히 확산하는 전염병 정보도 제공된다. 실제 중국은 지난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유전체 서열을 수집해 WHO에 제공한 일이 있다. 당시 WHO는 이 정보를 다시 회원국들과 공유했고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국가들은 이 정보를 토대로 서둘러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미 보건 전문가들은 WHO로부터의 이탈이 부메랑이 되어 미국 사회에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은 대부분 몇 주 만에 전 세계로 확산하는 상황에서 WHO와의 공조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공중보건법 전문가인 로렌스 고스틴 조지타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WHO에서 탈퇴하면 미국의 공중보건뿐 아니라 국가 이익과 안보에 더 깊은 상처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팬데믹 조약 타격...조류인플루엔자 확산 우려

미국의 탈퇴는 WHO가 주도해 각국이 참여하는 팬데믹 조약에도 큰 타격이 되고 있다. WHO는 제2의 팬데믹을 막기 위해 새로운 병원체 감시, 발병 데이터의 신속한 공유, 백신과 치료제 공급망 구축에 대해 각국이 법적 구속력을 갖는 국제 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과 보수 진영은 이 협정이 미국의 주권을 위협한다며 참여에 반대 뜻을 보여왔다. 글로벌 보건 기구인 리졸브투세이브라이브즈(Resolve to Save Lives) 대표인 토머스 프리든 전 CDC 소장은 사이언스와 인터뷰에서 “WHO를 대체할 기구는 사실상 없다”며 “이번 결정은 미국 영향력을 축소하고 치명적인 팬데믹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건 전문가들은 당장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1) 대응에서 전 세계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지난해 미국에선 우유에서 고병원성 바이러스를 발견한 데 이어 새에서 감염된 사망자가 나오는 등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이 WHO에서 탈퇴하면 미국에서 전개되는 감염병 상황에 대한 감시와 보고 의무가 사라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5년 전 WHO가 중국이 코로나19의 발원지임을 은폐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과연 미국이 WHO를 탈퇴한 상황에서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팬데믹에 대해 신속히 알릴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한편에선 트럼프 행정부에 주요 글로벌 보건 정책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힐 바에는 차라리 미국을 빼고 가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이 빠지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WHO에 따르면 회원국이 탈퇴하려면 1년 전에 통지해야 하고 현재 회계연도에 대한 예산 집행도 이뤄져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인 이번에는 가능성이 작지만,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미 의회가 탈퇴를 반대할 수 있다. 또 상당수 미국의 우방국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일부 정책수립자들이 WHO 탈퇴를 미루거나 탈퇴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기후협약·에너지 비상조치 “미국 과학 약화될 것”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WHO 외에도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탈퇴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하고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등 미국 내 과학 지형을 뒤바꾸는 조치도 단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재임 시절과 이번 대선 운동 기간 지구 온난화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며 지구 온난화 수준을 산업화 이전의 1.5~2도로 제한하는 파리 협약에서 탈퇴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첫 임기 때는 협정 규칙 때문에 탈퇴까지 3년 가까이 걸렸고 후임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탈퇴 절차를 철회했지만 이번에는 탈퇴 절차가 1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과학자들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미국이 탈퇴하면 중국과 인도 등 다른 배출 국가를 압박하는 명분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비상조치로 연방 규제와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는 법률이 막고 있던 화석 에너지 프로젝트가 재개될 것으로 예상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이 강력하지만 곧 경제 논리에서 한계에 부딪힐 것으로 보고 있다. 에너지 정책의 경우 이미 태양열과 풍력 같은 재생 에너지가 훨씬 저렴해지면서 더 많은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여러 전문가의 말을 빌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 명령이 기후와 공중보건을 포함한 다양한 과학 문제에 대한 정책의 우선 순위를 바꾸도록 설계됐다고 지적했다. 또 미국의 과학자를 포함한 정부 인력을 감축하고 잠재적으로 권한을 약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 단체인 우려하는 과학자연합(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의 그레첸 골드먼 회장은 ”며칠 동안 확인된 트럼프 행정부의 행정 명령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과학 기반의 정책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약화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참고 자료

Whitehouse(2025), https://www.whitehouse.gov/presidential-actions/2025/01/withdrawing-the-united-states-from-the-worldhealth-organization/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126/science.zxvum0n

Nature(2025),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5-00197-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