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의대 증원 정책 발표로 촉발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째가 됐다. 의료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은 대부분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의대생들은 휴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3000명 이상의 의사가 나왔지만, 올해는 300명이 채 안 된다. 신규 전문의 수도 예년의 20%에 그친다.
이대로 가면, 의정 갈등이 키운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만성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사상 초유의 의료 공백으로 남은 의료진은 번아웃을 겪고 있고, 이에 따른 환자 불편과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미래 의료를 책임질 인력 양성에도 차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 전공의 없는 병원, 업무 과부하로 외래 단축·전원 증가
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4일 오전 11시 집계 기준 전국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 1만3531명 가운데 8.7%인 1172명이 의료 현장에 복귀했다.
지난달 15~19일 레지던트 모집에도 1~4년차 9220명 중 단 2.2%인 199명만 지원했다. 사직 전공의의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수련·입영 특례도 적용했지만, 지원 인원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추가 모집 계획을 밝혔지만 이도 결과가 미미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대학병원들이 대부분 ‘전공의 없는 병원’으로 운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데, 의료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전공의 빈 자리를 메워온 의료진도 지쳐가고 있다.
특히 전공의 비중이 40%에 이르던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주요 대형 병원의 경우, 갑작스레 발생한 공백을 교수와 전임의 등 전문의, 의료지원(PA) 간호사가 메우고 있다.
병원 관계자들은 “진료 과목마다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업무에 과부하가 생기다 보니 신규 환자의 외래 진료를 일부 줄이거나 2차 병원으로 전원도 급증했다”고 밝혔다.
대학병원들은 현재로선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5대 대형병원(빅5 병원)의 한 관계자는 “그냥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며 “어쩔 수 없이 2차 병원으로 옮기게 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빅5 병원 관계자는 “우리 병원의 경우 외래 환자가 크게 줄지는 않았다”면서 “정년을 앞둔 교수들을 포함해 남아있는 교수진이 격무를 이어왔는데 의료진이 지친 상황”이라며 “언제까지 이 체제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초유의 의료 공백 사태 속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7월 6개월간 전국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초과 사망자가 3136명으로 추산됐다. 초과 사망자는 통상적으로 예상되는 사망자 수를 초과해 발생한 사망자를 뜻한다.
의료계는 의료진 부족으로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고령 만성질환 환자와 수술이 지연된 암 환자 등의 초과 사망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올해 의대 7500명 동시 수업… 의협 “불가능” vs 교육부 “차질 없어”
의대 교육 파행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작년 휴학 1학년생 약 3500명이 복학하면 올해 신입생 4000여명을 합해 최대 7500명이 1학년 수업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에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는 의대 교육 파행을 막기 위한 정부의 대책(마스터플랜)을 요구해 왔다.
이를 두고 교육부와 의료계의 시각차도 크다. 교육부는 ‘1학년 의대생’이 최대 7000명을 넘어도 당장의 차질은 크게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예과 1학년 수업은 대부분 교양 과목이라 수업 운영이 의대 단독으로 하지 않고 대학본부 차원에서 하므로 무리가 없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이와 함께 정부 지원 예산을 투입해 교육 현장의 우려를 해소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의료계는 교육 현장의 혼란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박단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은 “교육부는 예과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학생들이 갑자기 어디로 증발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일부 의대는 2학년 2학기부터 ‘기초 실습’에 들어가고 본과 1~2학년은 실습 수업을 주로 받는다. 교양 과목 위주로 듣는 의대 예과 1~2학년 때는 교육이 가능은 하더라도 실습을 본격적으로 하는 본과 4년 동안 의대 증원과 동시 복학 등으로 늘어난 학생을 제대로 교육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란 얘기다.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해도 문제다. 정부와 의학계가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집단 휴학 중인 2024학번 3000여명과 올해 입학한 2025학번 4000여명이 동시에 수업 거부를 하는 것이다. 자칫 6년 교육 과정이 도미노처럼 악영향을 받으면서 의대 교육의 혼란과 미래 의사 양성에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정부도 3월 개강을 앞두고 2024학번 휴학생들의 복귀 여부와 그 규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만, 학칙상 3학기 연속 휴학이 불가능한 대학이 15곳에 달하고 신입생은 휴학 자체가 어려운 대학이 많다는 점 등에서 대규모 휴학 사태가 지속될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이 나온다.
의료계는 이미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은 전공의들이 당장 복귀하기는 어려워진 만큼, 신뢰 회복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잘못된 정책에 대한 인정과 전공의가 수련받을 수 있는 제대로 된 환경을 만드는 게 따라줘야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창수 전국의대교수협의회장(연세의대 예방의학과 교수)은 “정부가 잘못된 의료 정책을 강행한 것을 인정하는 게 급선무”라며 “비정상적이었던 수련 환경을 정상화하는 것도 필수적으로 이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의료계와 정부가 함께 열악했던 수련 내용, 근무 시간, 보상 등을 분명하게 개선해야만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며 “바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들의 신뢰를 쌓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오는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주최하는 ‘의료 인력 수급 추계 위원회’ 공청회가 의정 갈등 해결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기대 섞인 관측도 나온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공청회에 참석해 공식 입장을 밝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