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최근 학과장들에게 대학원 선발 인원을 대폭 줄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한 학과는 합격 인원 17명 중 10명에 대해 합격 취소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학 교수들은 현지 언론에 “국립보건원(NIH)이 2억4000만달러(약 3400억원) 지원금을 삭감한다고 밝혀 대학원부터 운영 규모를 대폭 줄여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특히 NIH 지원에 의존하는 의과대학의 경우, 입학 인원을 60% 가까이 줄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연방 정부가 기초 과학 연구비를 대폭 삭감하면서 미국 과학계가 혼란에 빠졌다. 박사급 고급 인재를 비롯해 이번 연구비 삭감의 직격탄을 맞은 연구자들은 미국을 떠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이들을 잡으려는 중국과 유럽 등 주요국 정부와 대학·연구 기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미국발(發) 인재 선점에 각국 정부가 적극 나서는 것이다.

◇연구비 삭감에 인력 감축 불가피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 연방 정부는 앞으로 10년간 정부 지출을 2조달러(약 2870조원) 줄이겠다고 밝혔다. 이 여파는 정부 산하 연구 기관의 예산 삭감 추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과학 연구 자금 지원을 맡는 국립과학재단(NSF)은 최근 백악관 인사관리국(OPM)으로부터 올봄에 직원 중 절반이 해고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관의 예산 30% 삭감을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에 요청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래픽=김성규

NIH도 연방 정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줄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특히 포용성(DEI) 관련 연구와 중국 기관과 공동 연구하거나 중국 대학에 지원 자금이 흘러들어가는 연구에 대해선 지원을 중단하라는 요구였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NIH 자료를 입수해 “최소 16건의 연구에 대해 계약 해지 서한이 이미 발송됐고, 앞으로 추가로 중지되는 연구가 수백 건에 달할 것”이라고 지난 6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관련된 연구원 상당수가 일터를 잃고, NIH 지원을 받아온 미국의 바이오·의학 분야 대학원들은 선발 인원을 줄이고 있다.

◇美 떠나는 인재들에게 손 내미는 中

중국은 연구비 삭감으로 불안한 미국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5일 베이징에서 열린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중국 정부는 해외 인재 채용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이 국가 경제 및 사회 발전 계획 초안을 발표한 이날 후아이진펑 교육부 장관은 “국가 전략적 수요에 부응하는 수학과 컴퓨터 과학 등을 중심으로 기초과학 인재 양성을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이 분야 해외 인재들을 공격적으로 유치해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또 중국 명문대 가운데 일부는 중국 학사, 석사 학위가 없어도 박사과정에 진학할 수 있도록 입학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칭화대, 푸단대, 시후대 등이 이런 입시안을 발표했다고 보도하면서 “미국의 대학원생 모집 중단 여파로 입지가 좁아진 젊은 인재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다른 국가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노르웨이 최대 기술 및 과학 전문직 종사자 협회인 테크나(Tekna)는 미국 출신 학생·연구원이 노르웨이에 정착할 수 있는 즉각적인 조치를 마련하라고 정부에 요구 중이다. 호주 싱크탱크인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는 지난 7일 보고서를 통해 “실직한 미국의 연구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패스트 트랙 비자 제공이 필요하다”며 “호주 정부가 빨리 대응한다면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과학계 인재를 위한 특별 비자 제도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과 캐나다는 미국을 떠나는 연구자들 영입에 특별 비자를 적극 활용할 전망이다.

◇대응책 고심하는 韓, 비자 개선 고려

우리 정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달 해외 인재 유치 전략 간담회를 열고 의견을 수렴했다. 외국인 연구자들에게 폐쇄적인 분위기, 연구비 지원 체계의 미흡함 등이 문제로 지적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달 중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를 갖고, 해외 인재 유치를 위한 구체안을 5월까지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해외 과학인 비자 개선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법무부와 협의 중”이라며 “산업계 인재를 모집하기 위해 도입하기로 한 ‘톱 티어 비자’와 과학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비자는 다를 수 있어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을 비롯해 주요 국가들이 미국 인재를 잡으려고 각종 정책을 이미 시행 중인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지현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은 “미국을 떠나는 인재 중에서 우리가 유치할 타깃을 정하고, 이에 적합한 정책을 신속하게 펼쳐야 한다”며 “미국을 떠나려는 한국 출신 인재들을 불러모으는 정책도 시행해야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