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진은 생후 25개월 미만의 영아들을 대상으로 기억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fMRI 장비를 이용해 아기의 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했다./Yale University
연구를 진행한 트리스탄 예이츠(왼쪽) 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진이 기억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영아의 뇌 해마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확인하고 있다./Yale University

사람은 보통 태어나고 3년 동안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에 ‘영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로이트가 의문을 가진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과학자들은 왜 생후 3년간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미국 과학자들이 영아기 기억상실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니콜라스 터크-브라운(Nicholas Turk-Browne) 예일대 교수는 “생후 12개월 정도의 아기들도 기억을 형성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21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영아기 기억상실의 원인이 기억을 형성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형성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아기 기억상실의 원인을 놓고 과학자들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기억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영역인 ‘해마(hippocampus)’가 영아기에는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다는 가설이 있다. 생후 3년 정도의 기억이 없는 건 영아기에 해마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기억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반면 영아기의 해마에서도 기억이 만들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로 인해 영아기 시절의 기억에 접근하지 못해 기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어떤 견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생후 4~25개월 된 영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생후 12개월 미만의 영아가 13명, 12~25개월 된 영아가 13명 총 26명의 영아가 실험에 참여했다.

연구진은 영아의 해마가 개별적인 기억을 형성할 수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기억 과제를 제시했다. 아기에게 얼굴, 장면, 사물 등 여러 이미지를 보여준 뒤 시선의 움직임을 확인해 보여준 이미지를 기억하는지 확인하는 기법이다. 이 모든 과정은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비를 이용해 아기의 뇌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관찰했다. 만약 아기가 기억을 하면 뇌의 해마에 피가 몰리고, fMRI 영상에 불이 켜진 것처럼 나타난다.

실험 결과 아기의 해마 전체 영역에서 한 번 본 이미지를 볼 때와 처음 보는 이미지를 볼 때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런 차이는 생후 12개월을 기준으로 더 뚜렷했다. 12개월 미만의 영아보다 12개월 이상의 영아에서 해마 영역의 반응이 분명했다. 연구진은 “생후 12개월 정도면 개별적인 경험을 기억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라며 “영아기 해마도 짧은 시간에 시각적 경험을 개별 기억으로 부호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를 토대로 영아기 기억상실의 원인이 개별 경험을 기억으로 만드는 부호화 과정이 아니라 그 이후 기억을 꺼내는 인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생후 1년 무렵부터는 개별 경험을 부호화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발휘되기 때문에 영아기 기억상실의 원인은 그 이후 과정에 있다고 추정했다.

앞서 동물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영아기에 형성된 동물의 해마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는 기억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강제로 자극을 주자 영아기에 형성된 해마에서도 기억 반응이 인출됐다. 연구진은 “인간의 경우에도 영아기에 형성된 해마가 기억을 형성하는 부호화는 지원하더라도 시간이 지난 뒤에 기억이 자연스럽게 인출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를 접한 다른 과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폴 프랭클랜드(Paul W. Frankland)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사이언스에 같이 실린 논평 논문에서 “이번 발견은 영아기 기억상실이 실제로 기억을 잘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형성된 기억을 유지·인출하는 사후 과정이 성숙하지 못해서 사라지는 것이라는 동물 연구 결과와 일맥상통한다”며 “적절한 기억 상기 단서나 해마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면 영아기 시절의 기억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이 설치류 연구 결과로 밝혀진 바 있다”고 말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5),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dt7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