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과학자의 위인전만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소년이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과학자 말고는 들어설 다른 직업이 없었다. 어떤 과학자가 될 지만이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정답은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불현듯 찾아왔다. DNA에 저장되어 있는 유전자 암호들이 mRNA를 거쳐 단백질로 번역되는 과정을 처음 배운 순간 생명의 신비에 눈 떴다. 수십 년 후 소년은 우리나라 최고의 생명공학자이자 약학자로 성장했다. 고등학생 때 눈 뜬 단백질 번역효소의 생리학에 천착한 결과 노벨상에 근거한 우수과학자상, 한국과학상, 대한민국최고과학자상, 호암의학상 등 과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를 휩쓸었다. 현재 연세대 약학 및 의과학 교수이자 자이메디의 대표인 김성훈 교수(66) 이야기다. 과학자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은 그는 현재 신약 개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 교수를 만나 창업기를 들었다.
◇단백질 번역효소 연구에 평생을 쏟은 과학자
김성훈 교수는 서울대 약대 졸업 후 카이스트에서 생명공학 석사를, 미국 브라운대에서 분자유전학 및 생화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후 미국 MIT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았다. 누구보다 활발히 연구했다. 지금까지 작성한 논문만 300건이 넘는다. 2001년부터 약 20년간 서울대 약대 교수로 활동하다가, 2020년부터 연세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학자로서 그의 이력은 짧게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지만, 그 이면엔 치열한 성찰과 고민이 있었다. “생명 현상을 파고들기로 한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경이롭거든요. 하지만 본 것들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제 한계가 아쉬웠습니다. 제가 뛰어든 주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했습니다. 연구를 할수록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동료 과학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커 젊은 시절엔 가슴 앓이를 꽤나 했습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부침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그는 단백질 번역효소(ARS) 연구에 평생을 쏟았다. “학계에서 이미 증명이 끝났다고 간주됐던 ARS의 숨어있는 기능들을 집중 탐구했습니다. ARS의 1차 의무는 유전자 암호를 단백질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DNA와 단백질을 연결하는 통역사 역할을 하죠. 과거의 연구는 ARS의 1차 의무에 머물러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에 질문 하나를 더 던졌습니다. 과연 ARS가 유전자의 번역 업무만 수행할까. 이렇게 중요한 효소라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생명체는 단백질 합성에 많은 에너지와 효소 그리고 다양한 조절인자를 투입한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ARS효소들의 역할이 유전자 번역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 같다고 가정했다. “ARS들이 단순한 효소가 아니라, 우리 몸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감지하는 다기능성 효소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제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죠. 흥미로운 가설이지만 보여줄 증거가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정부에서 이 과제를 연구할 기회를 준 것이다. “1998년부터 9년간 창의적연구진흥 사업에 선정돼 연구단장으로 이 연구를 이끌었습니다. 제 학설이 옳은지 증명하며 이 시기를 보냈습니다. 열심히 논문을 쓰며 여러 증거를 보여줬더니 그제야 권위 있는 학자들이 믿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ARS들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연구가 인간의 질병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나’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습니다. 때마침 2010년부터 9년간 글로벌 프런티어 사업의 단장으로 활동하게 됐어요. 약 80여 명의 국내외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며 ARS가 인간의 질병에도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ARS를 통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 나섰습니다.”
치열한 노력 끝에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ARS의 병태생리학적 중요성들을 세상에 제시했다. 기존의 ARS 연구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종종 ARS가 세포 바깥으로 나가 호르몬처럼 신호 전달을 하거나, 세포핵으로 들어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현상을 포착했습니다. 일련의 현상들은 주로 세포가 비정상적 상황일 때 발생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런 ARS들의 기능을 막거나 활용하면 새로운 개념의 질병 치료제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20여 년간의 기초연구와 중개연구로 연구 테마에 대한 가닥이 잡히자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과학자로서 가장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자 직면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했죠. 이제는 새로운 치료제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차례라 생각했습니다.”
◇ 미국 국립보건원과 임상 진행
국가 사업단 단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개인 창업을 할 수 없다. 창업 전까지는 ARS를 이용해 신약을 개발하는 타 기업에 도움을 줬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기반을 둔 ARS 전문 제약회사의 창업을 도왔으며 국내 유명 제약사의 ARS 기반 신약개발을 지원했다. 전자는 ARS 기반 신약으로 임상3상까지 갔고, 한국 기업은 또 다른 약으로 임상2상까지 진행했다. 국가 사업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 자이메디 법인을 설립했다.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약 연구를 시작했다.
자이메디는 ARS 기반의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각각의 개발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고 있다. “폐동맥고혈압 치료를 위한 퍼스트인클래스(first-in-class. 계열 내 최초) 항체치료제 ZMA001, 대사 이상에 따른 지방간염 치료제 ZMC001, 항암제나 바이러스 백신과의 조합이나 융합을 통해 치료 효능을 높이는 면역증진제 ZMP201 등 다양한 치료제 라인업을 확보 중입니다. 모두 큰 관심을 받고 있어요. ZMA001은 이미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임상을 지원해, 한미협력과제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독일 제약회사의 글로벌 협력 프로젝트로 선정됐어요. 이 프로젝트를 통해 ZMA001의 적용 범위를 넓힐 구상입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ZMC001과 ZMP201도 새로운 기전의 참신함으로 다양한 기업들과 협력 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가장 진행 단계가 빠른 것은 폐동맥고혈압 치료제 ZMA001다. “병리조직에 존재하는 단핵구 및 대식세포막에서 염증 작용을 유발하는 특정 ARS 효소만 선별적으로 제어하는 항체입니다. 비임상 시험으로 약물의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했으니, 이제 임상으로 넘어갈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비용과 경험 부족이 문제였죠. 다행히 NIH에서 지원하는 임상 시험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돼 미국 정부의 세금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지원사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믿기지 않았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스타트업인데다, 미국 국적의 기업이 아니었으니까요. 제 반응을 본 NIH 책임자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혁신신약 개발에 미국 세금이 쓰이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 하고 되레 제게 말했어요. ZMA001은 올해 임상1상을 진행했습니다.”
나머지 두 약에 대한 기대도 크다. “과거에는 술을 많이 마시는 분들만 지방간염에 걸렸지만, 요즘은 달라진 식습관과 줄어든 활동량 때문에 청년들도 많이 걸려요. 그래서 현대판 팬데믹이라고도 불리죠. 이토록 보편적인 질병인데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만큼 개발이 힘들기 때문이죠. 지방 간염 치료제인 ZMC001는 ARS를 타깃으로 한 신약으로, 현재 후보 물질을 만들어서 비임상에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ZMP201은 ARS효소에 숨어있던 면역 증진 기능을 찾아내 신약으로 개발한 것이다. “기존의 면역증진제보다 효능을 높이고 부작용은 보완한 신물질입니다. 시중의 면역 증진제들은 박테리아 찌꺼기 같은 저렴한 재료를 쓰는데, 독성이 높아서 부작용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는 인체 ARS에 있는 단백질 조각을 찾아, 이를 활용했어요. 몸에 늘 있는 ARS를 활용하니 훨씬 안전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국과 한국 창업의 차이점
과거 그는 미국에서 두 회사의 창업에 관여해 나스닥에 상장시킨 경험이 있다. 자국에서 창업을 해보니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절감했다. 미국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영역에 집중하는 시스템이다. 연구자는 연구에만 몰두하면 된다.
한국에서는 대표자(CEO) 직함을 다는 순간부터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연구자 출신이라도 경영, 재무, 마케팅, 인사 전반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역할의 확장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서울바이오허브다. 서울바이오허브는 서울시가 조성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고려대가 운영하는 바이오·의료 창업 혁신 플랫폼이다.
서울바이오허브와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2년 한국BMS제약과 서울바이오허브가 주최한 창업경진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우승을 계기로 입주 공간을 지원받고, 여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가장 도움이 된 건 네트워킹이었어요. 바이오벤처는 국제적인 인지도가 있는 제약사 및 기관과 협업을 하면서 자사의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성장하는데요. 서울바이오허브가 여러 기관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IR 기회도 여러 번 마련했어요. 제가 해외로 나갈 때마다 네트워킹 기회를 만들어줘서, 의미 있는 만남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바이오벤처 경쟁력을 위해 이런 창업 지원 생태계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바이오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요. 이제는 시장이 성숙기에 갈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타깃 발굴부터 중개연구를 거쳐 약물의 개발까지 통상 30~40년 걸리는 과정을 견딘, 진정한 의미의 퍼스트인클래스 신약이 나와야 할 때죠.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미국 기업과 경쟁한다고 가정해보세요. 재정과 경영 전문가가 최고의 연구자와 뭉쳤는데 혼자서 이길 도리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연구진들의 능력과 열정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관건은 환경인데요. 연구자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서울바이오허브 같은 기관이 많아져야 합니다. "
◇한 가지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는 과학자가 되겠습니다
자이메디는 올 들어 연이어 호재를 맞이했다. 지난 7월, ZMA001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희귀의약품(ODD)으로 지정됐다. ODD로 지정되면 임상 시험에 대한 세제 혜택, 장기간의 시장 독점권 부여, 조건부판매 허가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신약의 상업적 가치가 높아지는데다 임상 시험에 많은 환자를 모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스타트업 입장에선 성공의 발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는 12월에는 미국 흉부학회에서 ZMA001의 기전과 폐동맥고혈압의 관련성이 다뤄질 예정이다. 당사자가 아닌 미국 임상의가 자이메디의 기술을 검증해서 발표하는 자리는 처음이다. 그만큼 의미가 크다.
자이메디를 통해 한국에서도 ‘기초연구에서 임상까지 (from bench to bedside)’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목표다. “한가지 연구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국의 과학자들은 매년 연구비 걱정에 괴로워합니다. 끊임없이 바뀌는 정책에 맞춰 연구 주제를 바꾸다 보니, 은퇴할 시점에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데, 나는 뭘 증명했나’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과학자도 많습니다. 과연 그들이 훌륭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과학자는 사회가 키워주는 직업입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전폭적인 지원 없이 맨 몸으로 할 수 없어요. 사회의 도움으로 연구를 해 온 사람으로서, 후배 과학자에게 희망이 될 사례를 일구고 싶습니다. 자이메디의 성공이 그동안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라 믿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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