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70대 김모씨는 사모펀드에 노후 자금을 투자했다가 돈을 모두 날릴 위기에 처했다. “안전하다”는 증권사 직원 말만 믿고 전재산 3억원을 맡겼던 것이다. 사고가 터지자 김씨에게 고분고분하던 증권사도 태도가 돌변했다. 가입 당시 녹음한 파일이나 자료를 요구해도 증권사는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했기 때문이다.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금융감독원이나 증권사 앞에서 피해자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대구와 서울을 오가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25일부터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그동안 금융사와 소비자 간 금융 분쟁이 생기면, 소비자들이 금융사의 잘못을 입증해야 했다. 무수히 많은 금융 분쟁을 겪고, 법무팀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포진해있는 금융사를 개별 소비자들이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김씨처럼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대응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금소법은 이렇게 기울어졌던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단순 변심으로도 비용 없이 금융 상품 취소 가능
금소법 시행으로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상품 가입 후 소비자들이 세 가지 권리를 얻었다는 것이다. 청약 철회권, 위법 계약 해지권, 자료 열람 요구권이다.
‘청약 철회권’은 소비자가 금융 상품에 가입한 후 일정 기간 안에 일방적으로 가입을 파기할 수 있는 권리다. 이때 금융 상품에 특별한 하자가 없거나 금융사가 위법 행위를 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단순 변심만으로 가입을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소비자가 이 권리를 남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금융 당국은 원칙적으로 모든 금융 상품에 청약 철회권을 적용하되 향후 상황을 감안해 적용되는 금융 상품 범위를 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청약 철회권은 보험 상품 등 일부 금융 상품에만 있었는데, 25일부터는 모든 금융 상품에 적용된다. 상품별로 철회 가능 기간은 다르다. P2P 대출 같은 대출성 상품은 14일 이내, 보험 같은 보장성 상품은 15일 이내, 펀드 등 투자성 상품은 7일 이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금융사는 소비자의 청약 철회 신청을 접수한 후 3영업일 이내에 수수료를 포함해 이미 받은 모든 돈을 반환해줘야 한다. 다만, 카카오페이 같은 직불·선불 결제는 제외된다. 금융 상품이 아니라 지불 수단이라는 이유에서다.
불완전 판매 등 금융사의 위법 행위가 드러났을 때 소비자가 금융 상품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위법 계약 해지권’도 신설됐다. 이 권리 역시 모든 금융 상품에 적용된다. 위법 계약 해지권은 계악일부터 5년 이내 또는 소비자가 금융사의 위법 사실을 안 날부터 1년 이내에 청구할 수 있다. 소비자는 금융 상품 명칭과 법 위반 사실이 기재된 계약 해지 요구서를 제출하면 되고, 금융사는 10일 이내에 해지 요구에 대한 수락 여부를 통지해야 한다. 해지 요구를 거절할 경우 사유도 함께 통지해야 하는데, 정당한 사유 없이 해지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해지 요구에 따라 계약이 종료되면 금융사는 소비자에게 수수료나 위약금 등 모든 관련 비용을 요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금융사가 보유하고 있는 금융 거래 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자료 열람 요구권’도 생겼다. 금융사는 계약 체결 자료, 계약 이행 자료, 광고 자료, 내부 통제 자료 등 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할 때의 자료들을 기록하고 유지해야 한다. 자료 열람 요구권에 따라 소비자는 금감원의 분쟁 조정이나 소송 과정에서 권리 구제를 위해 금융사가 보유한 관련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금융사가 자료의 기록이나 유지, 관리 의무를 위반할 경우 1억원 이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다만 이 권리는 금융사들이 자료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할 시간을 감안해 9월 25일부터 행사할 수 있다.
◇불완전 판매 앞으로 금융사가 입증해야
그동안 소비자들이 불완전 판매를 한 금융사와 소송을 하려면 스스로 녹취 파일 등 관련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금융사의 위법 행위에 대한 입증 책임이 소비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25일 금소법 시행 후엔 입증 책임 당사자가 소비자에서 금융사로 전환된다. 즉 소비자들은 “금융사가 설명 의무를 위반했다”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되고, 금융사가 고의·과실이 없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금융사들은 판매 전 과정을 녹음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더욱 촘촘하게 자료 수집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소비자가 2000만원 이내 소액 분쟁 조정을 금감원에 신청했을 때 금융사는 분쟁 조정이 완료될 때까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소송이 진행 중인 경우라도 소비자가 분쟁 조정을 신청하면 법원이 관련 소송을 중지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금융위 관할인 신협을 제외하고 농협·수협·산림조합·새마을금고는 아직 금소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각 상호금융별로 감독하는 부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금융 당국은 관계 부처와 협의해 4월까지 상호금융에서도 금소법 수준의 소비자 보호 규제가 적용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