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3일 서울 한 은행 앞에 대출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다음 달 중순 주택 매매 잔금일을 앞두고 대출받기 위해 A은행을 찾았던 김모(38)씨는 2장의 신용카드를 발급받고, 보험 1개까지 들어야 했다. 대출 담당자는 “3% 초반 금리는 지금 어느 은행을 가더라도 받기 힘든데 적용해주겠다”며 “횡포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가입하고 1년 뒤 해지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A은행이 만든 금융 앱 2개를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가입해야 했고, 새로 출시된 서비스까지 신청하고 나서야 “필요한 돈을 빌려주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돈을 빌리는 게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라며 “억울했지만 조금이라도 싼 이자로 필요한 돈을 구하려면 별 도리가 없더라”고 했다.

은행 등이 대출을 해주면서 예금이나 적금, 보험 등 다른 금융 상품 가입을 요구하는 속칭 ‘꺾기’가 변형된 형태로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금융 당국이 잇따라 근절 대책을 내놓고, ‘꺾기’ 등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사각 지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소법에 따라 대출 전후 1개월 이내에 같은 금융사에서 다른 금융상품에 가입하게 되면 불법이기 때문에 1개월이 지난 뒤 금융 상품에 가입시키는 ‘시간차 꺾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3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2020년 ‘시간차 꺾기’ 의심 사례가 23만1719건(10조8007억원)에 달했다. 1년 전(17만3586건)보다 33.5% 늘었다. 금소법이 시행된 2021년 상반기에도 시간차 꺾기가 8만4070건(4조957억원)에 달했다.

그래픽=박상훈

◇대출신청자 4명 중 1명 “꺾기 요구받았다”

‘꺾기’는 금융권의 해묵은 악성 관행이다. 금융 당국은 지난 2015년 금융사가 우월적 지위를 악용하고 있는 관행이라면서 꺾기를 ‘민생침해 금융악’으로 규정해 단속하기도 했다. 2021년 3월 시행된 금소법에서는 “대출상품 판매 전후 1개월 내 예·적금 등 은행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이를 위반하면 금융사와 임직원 제재 및 과징금·과태료를 물도록 했다.

그러나 ‘1개월 이내’라는 기간을 벗어나는 ‘시간차 꺾기’는 제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금감원이 마지막으로 꺾기 위반 통계를 발표한 2014년 상반기에는 적발된 건수가 5건에 불과했다. 금소법 시행 이후에 적발된 꺾기 위반 건수는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원회가 매년 금융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꺾기’를 요구받았다는 응답이 늘어나는 추세다. 작년 11~12월 조사에서는 대출받은 소비자 중 26.1%가 “대출 과정에서 적금·보험 등 다른 금융상품에 가입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답했다. 4명 중 1명 이상이 요구를 받은 셈이다. 2019년(24.4%)과 2020년(25.4%) 조사 때보다 늘었다.

◇법망 피해가는 신종 꺾기 등장

법망을 피해가는 금융사의 꺾기는 ‘시간차’뿐만이 아니다. 금소법 감독 규정에는 불공정영업행위에 해당하는 상품으로 보장성 상품, 투자성 상품, 예금성 상품으로 명시돼있다. 신용카드 발급은 규제 대상에서 빠져 우대 금리를 적용해주겠다면서 공공연히 카드 발급을 요구하고, 기존 대출 고객을 대상으로 금리 조정 조건으로 금융상품 가입을 유도하기도 한다. 금소법 위반 기간을 피하기 위해 대출 모집인 등을 통해 대출이 실행되기 1개월 이전에 신청하도록 압박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위반 기간을 늘리게 되면 또 다른 편법이 나오는 데다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며 “피해자들이 나서주지 않으면 입증도 쉽지 않다”고 전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사실상 금소법을 피해 꺾기 영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며 “결국 은행들이 꺾기를 자제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년 하반기 IBK기업은행의 경우 영업점 평가 기준에서 꺾기 판매 항목을 삭제했다.

☞꺾기

은행 등이 대출을 해주면서 예금, 적금, 보험 등 다른 금융 상품 가입을 강요하는 영업 행위다. 작년 3월부터 대출 전후 1개월 이내 ‘꺾기’는 금지됐지만, 이 기간을 피한 ‘시간차 꺾기’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