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 고금리에 빚 부담마저 커지며 내수가 부진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2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4분기(10~12월) 가계부채(가계신용)는 3분기 연속 증가하면서 1886조4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작년 초에는 금리 상승과 부동산 경기 둔화에 반짝 감소했지만 이내 증가세로 반전했다. 빚을 갚느라 가계의 소비는 위축되고 있다. BC카드는 교육을 제외한 모든 분야서 지난 1월 카드 사용액이 전달보다 9.5% 급감했다고 이날 밝혔다. 1월은 카드 사용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1년 1월(-4.9%), 2022년 1월(-5.4%)보다 감소 폭이 더 컸다.
주변 상황도 소비 개선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금리를 좌우하는 미국이 상반기 중 기준금리가 인하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끈적하게 이어지는 고물가 때문이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전망치(2.9%)를 웃도는 3.1%로 나오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작년 하반기부터 다시 고개 든 가계빚
작년 4분기 말 가계부채는 전 분기보다 8조원(0.4%) 증가했다. 여기서 가계부채란 가계신용으로 가계가 은행 등에서 받은 좁은 의미의 가계대출에 대금 결제가 아직 안 된 신용카드 판매액(판매신용)을 합친 것이다.
특히 은행에서 가계가 빌리는 대출이 증가세로 돌아섰다. 작년 상반기엔 전년보다 26조1000억원 줄었지만 하반기에 15조원이 늘었다. 이유는 주택담보대출 때문이었다. 주택담보대출은 한은이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7년 이후 한 분기도 빼놓지 않고 계속 불었다. 대출 잔액은 10년 전인 2013년의 500조원대와 비교했을 때 현재 두 배 수준(1064조3000억원)이다. 서정석 한은 금융통계팀장은 “서울 입주 물량이 작년 4분기에 몰린 영향이 컸다”고 분석했다.
경제 규모와 비교한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집계한 주요 43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신용 비율은 작년 2분기 말 기준 한국이 101.7%로 스위스(126%), 호주(111.1%), 캐나다(103.2%)에 이은 4위였다. 전 세계 평균은 62.4%였다. 한 나라 경제 규모보다 가계빚이 더 큰 나라는 우리나라까지 4국뿐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교수는 “가계빚이 쌓여 있는데 금리까지 높아 원리금 상환 부담이 크다”며 “가계의 부담이 크다 보니 소비가 위축되고, 전반적인 내수도 부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올해 내수 전망도 어두워
소비자들은 통상 연말에 늘렸던 소비를 새해에 줄인다. 하지만 작년엔 연말인 12월에도 소비를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작년 12월 소매 판매액 지수는 전달보다 0.5% 감소했다. 작년 전체로는 소매 판매액 지수가 전년보다 1.4% 줄며 2년 연속 하락했다. 특히 주요 유통 채널인 편의점의 지난해 소매 판매액 지수는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5.2% 떨어졌다.
게다가 연초 카드 사용액이 크게 감소한 게 올해 내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BC카드는 주요 7분야 중 교육을 제외한 교통(운송·주유), 레저(스포츠·숙박), 쇼핑(온·오프라인), 식음료(식당·음료·주점), 의료, 펫·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지난달 사용액이 줄었다고 밝혔다. 특히 연말을 맞아 관객 수요가 몰렸던 문화 업종은 한 달 만에 48.9% 급감했다. 펫 관련 사용액도 21.5% 줄었다. 주유 업종은 국내 유류 소비 감소로 19.4% 감소했다. 스포츠(-17.5%)·주점(-16.2%)·식당(-14.1%) 등도 두 자릿수 하락세를 보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앞서 14일 경제 전망을 수정하며 올해 민간 소비 증가율 전망치를 1.8%에서 1.7%로 0.1%포인트 낮췄다. 상품·서비스 소비 모두 부진한 가운데 고금리 영향을 많이 받는 상품 소비가 더 위축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민간 소비 부진의 원인인 고금리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올해는 민간 소비가 크게 개선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