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미국 시카고옵션거래소(CBCE)에서 트레이더들이 주문 내용을 소리치고 있다. 최근 사람 개입 없이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초단타로 거래를 실행하는 고빈도 매매(HFT) 비율이 상승하면서 금융시장의 극심한 변동성도 커지고 있다. /AP 연합뉴스

트럼프의 관세 변덕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지난 7일 뉴욕 주식시장 개장 전인 8시 30분, 케빈 해싯 미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90일간 관세 유예를 고려할지 묻는 말에 “대통령이 무엇을 결정할지는 대통령이 결정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것이 잠시 후 시장을 뒤흔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오전 10시 11분, 팔로어가 1000명도 채 되지 않는 한 X(옛 트위터) 계정에 처음으로 “헤싯: 트럼프가 중국을 제외한 국가의 관세를 90일간 유예하기로 했다”는 짧은 한 줄이 등장했다. 곧이어 100만 팔로어를 보유한 금융 인플루언서 월터 블룸버그의 계정에도 복사됐다. 이후 CNBC, 로이터 등 뉴스 채널을 타고 퍼졌다.

그래픽=백형선

오전 한때 4835.04포인트까지 떨어졌던 S&P500은 이 뉴스가 삽시간에 퍼진 10시 8~18분 5246.57포인트까지 로켓처럼 치솟았다. 저점에서 고점까지 변동 폭은 8.5%. 단 10분 걸렸다. 백악관이 ‘가짜 뉴스’라고 발표하면서 시장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도 불과 20여 분이 소요됐다. 30여 분 사이 움직인 시가총액은 4조9000억달러(약 7000조원)로 한국 1년 예산의 10배가 넘는다.

◇변동성 불쏘시개, 고빈도 매매

이런 사례와 같이 금융 위기 때를 뛰어넘는 최근 금융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은 알고리즘 트레이딩, 특히 고빈도 매매(High Frequency Trading·HFT)가 거래 주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심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고빈도 매매는 사람의 개입 없이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밀리초(1000분의 1초)에서 나노초(10억분의 1초) 사이 거래를 실행하는 것이다. 통상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를 통한 체결 속도(0.02~0.05초)에 비해 훨씬 빠르다. 주가 고점에서 매도하고 저점에서 매수하는 방식으로 매수와 매도 주문의 차이(스프레드)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경우가 많다. 2000년대 초 미국 월가에서 처음 등장해 2008년 금융 위기 전후로 전면 부상했다. 최근 들어 AI(인공지능) 기술을 장착한 HFT는 더 강력해지고 있다. 스스로 시장 변화를 학습해 더욱 빠르고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단타 거래 방식의 설계자들은 쏟아져 나오는 뉴스나 공시 등을 재빠르게 포착해 거래로 연결짓도록 구조를 짜놓는다. ‘긍정적’ 이슈에는 자동 매수를, ‘부정적’ 이슈에는 자동 매도를 하는 식이다. 현재 뉴욕 증시 거래 체결량의 60~70%를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7일의 해프닝에 대해 “뉴스 제목에 몇 초 안에 반응하는 월가의 고빈도 매매 전략이 자산 가격에 얼마나 쉽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라고 했다. 뉴욕의 한 투자자도 이날을 돌아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장은 알고리즘이 장악했고, 매수 주문이 맹렬히 쏟아져 들어오는 광란의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블룸버그통신에 전했다. 그 어떤 민첩한 투자자보다 알고리즘이 더 먼저 움직여 시장의 거대한 흐름을 만드는 셈이다.

◇뉴스 뜨면 10억분의 1 ‘나노초 단타’

한국도 고빈도 매매 비율이 점차 커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한국에서 HFT 거래 규모는 2023년 1647조원에서 지난해 2073조원으로 26% 가까이 늘었다. 거래 비율도 같은 기간 29%에서 37%로 뛰었다. 지난달 18일 벌어진 주식 전 종목 거래 ‘올스톱’ 사태 원인 중에 이 거래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알래스카 가스관 관련 테마주인 동양철관에 폭주한 주문이 호가 시스템 오류와 맞물리면서 거래가 중지됐다는 것이다.

국내에선 지난달 초 대체 거래소의 등장으로 고빈도 트레이더들 비율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거래소 두 곳에서 모두 거래되는 종목은 일물일가(一物一價) 원칙에 따라 가격이 수렴하는데, 그 찰나의 가격 차이를 고빈도 거래가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시장 변동성이 커질 것 같은 신호를 포착하면 더 높은 가격에 매수해서 스스로 차익 거래 기회를 만드는 시장 교란형 고빈도 매매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런 경우를 당국이 제대로 감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빈도 매매(HFT)

사람의 개입 없이 컴퓨터 알고리즘과 초고속 통신망을 이용해 짧게는 나노초(10억분의 1초)에 거래를 체결하는 투자 기법. 시장에 뉴스나 이벤트가 발생했을 때 빠른 시간에 미세한 가격 차이를 포착해 수익을 창출한다.